[삶의 의미를 고찰하다] 키를 재듯, 서로의 쓸쓸함을 대본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아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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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3

[문학 속 한 장면] 히구치 이치요 作, <키 재기>


히구치 이치요(1872-1896)의 작품들은 기적 같다. 이치요는 24년의 짧은 생을 살았는데, 죽기 전 1년 동안 <키 재기>, <탁류>, <십삼야>, <갈림길>, <섣달그믐> 등 대표작들을 써냈다. 이 기간은 ‘기적의 1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치요의 작품은 당시 여성 작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상류 사교계 묘사나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플롯에서 벗어나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고뇌, 감정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문체가 압권인데, 위화(余華)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녀의 서술은 햇살의 따사로움과 밤의 서늘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평한다.(<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219쪽)

번성하는 유곽의 아슬아슬한 삶

소설 <키 재기>의 배경은 19세기 말 일본, 밤새 “벌어지는 소란이 손에 잡힐 듯 들리고”, 인력거가 “밤낮없이 오가는” 요시와라(吉原) 유곽이다. 이치요는 생계를 위해 이곳 근처에 1893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약 9개월간 잡화점을 열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키 재기>에 반영되어 있다.

“소문이 끊이지 않는 속에서도 출세하는 것은 여자들뿐이고, 남자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점박이 고양이마냥 있어도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63쪽)는 서술은 이 유곽마을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이 마을의 경제는 유곽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남자들은 유녀인 아내나 딸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출세하는 것은 여자들뿐”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유녀(遊女)로서 출세하는 것일 뿐이다. 유곽의 화려함과 떠들썩한 생동감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어둠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초저녁에 웃옷을 걸치고 나서려고 하면 뒤에서 안전을 빌며 부싯돌을 마주치는 아내의 얼굴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무차별 살인에 말려든다든지 동반자살이 실패한다든지 해서 원망을 사기 쉬운 몸이라 앞날은 아슬아슬하니까 말이다. 잘못하면 목숨이 걸린 일임에도 놀러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우습다.

히구치 이치요, <키 재기 外>, 을유문화사, 31-32쪽

이 세계에 도사린 일상적인 폭력은 다른 단편 <탁류>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탁류>는 한 유녀에게 집착하다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유녀를 살해한 후 자신도 자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처럼 이치요 소설의 여성 인물들은 ‘유녀로서 출세’하더라도 언제 어떤 큰 불행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치요 소설에서는 신기하게도 비정함이나 불안함보다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도 인물이 선보이는 활달함과 작은 인정들이 한층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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