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에서, 미국 결혼 이민자가 되다
2024/02/05
저는 꽤 오래 싱가포르에 있었습니다. 5년은 좀 안 되는 시간이었죠.
한국에서 초,중,고,대학교까지 졸업하고. 배낭 하나 메고 싱가포르에 건너갔어요. 해외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영어도 잘 못하고, 돈도 없었지만 갖은 고생 끝에 취업에 성공했고 비자 스폰서까지 얻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죠.
아무도 나를 모르던 따스한 남국에서 모든 걸 새롭게.
이름도.
직업도.
다니는 회사도.
쓰는 언어도.
다 바뀌었어요. 그렇게 '모든 건 해피엔딩' 으로 흘러갈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3년 차. 몸이 좋지 않아 찾은 로컬 병원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암인 것 같으니 조직검사를 해야한다는 말.
당시 교제하던 남자친구와도 '결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커 헤어짐을 앞두고 있었고,
다니던 회사에서는 승진의 기회가 없어 더 이상 올라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 중 한 명은 우울증에 걸려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요.
불화를 거듭하던 부모님은 이혼을 결심하셨습니다.
심란하기 짝이 없던 나날이어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본분을 잊...
한국에서 초,중,고,대학교까지 졸업하고. 배낭 하나 메고 싱가포르에 건너갔어요. 해외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영어도 잘 못하고, 돈도 없었지만 갖은 고생 끝에 취업에 성공했고 비자 스폰서까지 얻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죠.
아무도 나를 모르던 따스한 남국에서 모든 걸 새롭게.
이름도.
직업도.
다니는 회사도.
쓰는 언어도.
다 바뀌었어요. 그렇게 '모든 건 해피엔딩' 으로 흘러갈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3년 차. 몸이 좋지 않아 찾은 로컬 병원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암인 것 같으니 조직검사를 해야한다는 말.
당시 교제하던 남자친구와도 '결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커 헤어짐을 앞두고 있었고,
다니던 회사에서는 승진의 기회가 없어 더 이상 올라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 중 한 명은 우울증에 걸려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요.
불화를 거듭하던 부모님은 이혼을 결심하셨습니다.
심란하기 짝이 없던 나날이어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본분을 잊...
전세계를 여행하며 일을 했습니다-만, 현재는 결혼 후 미국에서 남편과 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 회사, 미국회사, 싱가폴 회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마이너리티, 이민자, IT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퇴근 후에는 요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