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40편 - 아르헨티나·칠레·페루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4/25
아르헨티나 땅은 B.C 10,0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르헨티나 일대에서 부족별로 나뉘어 살았는데 가장 살기 좋은 동북부 지역은 투피-과라니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라고 불리는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푸체(Mapuche)족과 테우엘체(Tehuelche)족 등이 살았으며 서북부 지역은 15세기에 잉카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로 인해서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기에 잉카 제국 태양의 상징인 잉티(Inti)가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중엽에 파타고니아 일대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스페인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은 마푸체, 테우엘체, 야마나, 셀크남 족 등 원주민들이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인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이 설치되면서 다른 지역들까지 합병된다. 그러한 배경에서  호세 산 마르틴은 1778년 당시 스페인 라플라타 부왕령 코리안테스 주 야페유에서 탄생했다. 
사진 :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초상화 출처 : WIKIPEDIA

산 마르틴의 집안은 대표적인 크리오요(Criollo) 집안으로 팜파스에 상당히 넓은 농지를 갖고 있던 부유층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자 시골에 어머니를 두고 7세의 나이로 스페인에 건너가 마드리드에서 귀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산 마르틴은 마드리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칠레 출신의 같은 크리오요였고 후일 칠레의 국부(國父)로 알려진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1778~1842)와 친해졌다. 마침 둘의 나이 또한 동갑이었기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다. 산 마르틴은 오이긴스와 함께 1808년 스페인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영국과 싸웠고, 알제리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런던으로 끌려가 1년 이상 수감 생활을 했다. 이후에는 동맹이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우면서 군사적안 경험을 쌓았다. 기록으로 보면 바일렌 전투나 알부에라 전투 등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그는 남미의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는데 <산 마르틴 평전>에 의하면 당시 이탈리아에서 시몬 볼리바르, 시몬 로드리게스와 처음 만났다고 한다. 후일 있을 과야킬 회담에서 이미 그와 볼리바르는 구면이었던 셈이다. 1811년에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 건너가 제1 공화국을 건국한 시기와 비슷하게 산 마르틴도 라플라타 부왕령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절친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1770~1820) 등의 인물과 북부군, 혹는 안데스 연대를 편성하여 스페인 왕당파와 독립전쟁을 지휘했다. 1813년 산 마르틴은 산 로렌소 전투에서 스페인 왕당파를 패주시키고 1814년에는 북부군의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산 마르틴은 현재의 볼리비아, 북 안데스를 통해 진군하는 기존의 공격 방식이 별 효과를 얻지 못할 거라고 여기게 되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해 거기서 다시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진격해 페루를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산 마르틴은 국경 도시 쿠요의 행정관으로 부임하여 민병대를 조직했고 1817년 초에 마침내 한니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었던 것처럼 안데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면서 1817년 2월 12일 차카부코 전투에서 스페인 왕당파군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러나 1818년 3월 19일 칸샤 레야다 전투에서 왕당파의 반격에 패배하고 후퇴하지만 이어서 4월 5일 마이푸(Maipú)에서 마리아노 오소리오 장군이 이끄는 진압군을 맞아 싸워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그래서 4월 5일은 마이푸 전투의 승전일로 이 날은 매년 치뤄지는 칠레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해방된 칠레에서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 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대통령직을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이후 영국 백작 토마스 코크런을 해군 지휘관으로 초빙했다. 그는 자신이 계획했던 육해군 합동 작전으로 인해 페루의 해방을 실행시키고자 했다. 

1821년 7월 28일 육해군 합동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Protector Of Peru)'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산 마르틴은 페루의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고 그는 페루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산 마르틴은 페루와 아르헨티나 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 역사상 몇 안 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산 마르틴의 페루 해방은 불완전했으며 페루 내 각 세력들이 다툼을 벌이며 내전이 발생했다. 당시 페루 국내의 혼란은 극에 달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볼리바르의 군대가 페루 북부에 주둔하게 되고 이후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논의하기 위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시몬 볼리바르와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 과야킬 회담에 대한 공식 기록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작은 밀실에서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두 명만 남고 이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채 회담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남미의 두 영웅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이였으며 이미 구면이었지만, 의견 차이가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여 진다. 

마침내 산 마르틴은 자신의 군 지휘권을 포기하고 볼리바르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으로 물러섰지만, 이미 남의 밑에 있기에는 너무나 거물이었기에 볼리바르의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은 식민지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대해 산 마르틴은 유럽의 왕족을 초빙하여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제를 주장하였다. 이는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브라질에 있던 포르투갈 왕가들의 주도로 군주국으로 독립한 브라질을 예로 들어 근거를 내세웠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공화정에 입각한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다. 이처럼서로 간에 정치 구성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또한 볼리바르는 페루의 완전한 해방 및 독립을 자신이 실행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산 마르틴은 큰 소득 없이 볼리바르와의 만남을 마치게 된다.

그란 콜롬비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볼리바르와는 다르게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아르헨티나에서 왕정을 내세워 자신 스스로가 대통령이길 포기했고 칠레에서논 오랜 친구인 오이긴스에게 대통령을 내주었으며 페루에서는 볼리바르에게 권좌를 물려줬기 때문에 정치적인 입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결국 산 마르틴은 은퇴를 선언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산 마르틴은 프랑스에 입국하려 했지만 오랫동안 자신들과 적대해서 싸웠던 인물을 좋게 볼 리 없었다. 프랑스에서 입국을 거부다한 산 마르틴은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을 전전하며 쓸쓸하게 중년을 보냈다. 도중에 몇 번 귀국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그 당시 아르헨티나 정치 지도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 대다수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그를 존경했기에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붕괴될까 우려하여 입국을 거부했다.

이후 1830년 벨기에의 네덜란드 독립 전쟁 때 혁명군 지도자로 참가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사람임을 강조하여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로 건너가려 했다. 이전에 입국을 거부했던 프랑스는 산 마르틴의 망명을 허용했고 그는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1848년 다시 불로뉴쉬르메르로 간 다음 2년 후에 사망했다. 산 마르틴의 시신은 사후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져 아르헨티나의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국부(國父)인 산 마르틴은 시몬 볼리바르 못지않게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며 군인이었고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세 나라의 독립에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산 마르틴 자신의 이름을 딴 훈장은 현재 아르헨티나의 최고 훈장이며 아르헨티나 어딜 가도 그의 동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사실상 정치에서 실각한 계기인 과야킬 회담 당시 산 마르틴은 겨우 44세로 정치인으로써는 매우 젊은 나이였다. 산 마르틴은 은퇴 이후에도 25년 이상을 더 살았다.

만약에 산 마르틴이 칠레 해방을 끝으로 아르헨티나에 머물렀다면 분명히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의 시몬 볼리바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처럼 오랫동안 정치지도자로 남아 아르헨티나를 이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남미 각국의 행보를 볼 때 산마르틴이 유럽으로 가지 않고 모국인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독립 이후 대통령으로써 그 역할을 수행했었다고 해도 대 콜롬비아 공화국, 칠레 독립 이후 각각 모국들의 초대 대통령이 된 시몬 볼리바르와 같이 독재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 세력들과 대립하여 실각하거나, 오이긴스와 같이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으로 축출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나 오이긴스에 비하면 그나마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것으로 보면 산 마르틴의 처세술인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으로는 불운했지만 남은 삶에 있어 편하게 천수를 누렸던 운이 있었던 것인지 산 마르틴의 선택에 대해서 현재도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 🐄 🥛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얼룩소 시작하기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350
팔로워 16
팔로잉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