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쿠자, 아! 화려한 옛날이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인증된 계정 · 다른 시각을 권하는 불편한 매거진
2023/05/29

야기시타 유타 | 저널리스트


전성기를 잃어버린 일본의 야쿠자
오랫동안 일본의 야쿠자는 전설로 통했다. 하지만 야쿠자 배제 조례와 경찰의 단속 강화로 야쿠자는 15년 만에 조직원이 70%나 줄었다. 점차 야쿠자들의 씨가 마를 판이다. 

<타키야사 마녀와 해골 유령>, 우타가와 쿠니요시 - 1844년경

기노시타 타로(1)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짧은 머리와 탄탄한 체격을 가진 40대의 기노시타 타로는 건물 페인트칠 일을 하고 있다. 기노시타 타로는 도쿄 남쪽에 위치한 동네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면서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린다. 기노시타 타로에게는 특유의 침착함이 느껴진다. 10년 전 3,3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에 속하는 이나가와카이에 몸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기노시타 타로가 야쿠자 조직원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라면 잘린 새끼손가락이다. 잘린 새끼손가락은 야쿠자임을 나타내는 표시다. 그는 잘린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소매 안에 숨겼다. 현재 그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의 과거를 아는 고객은 한 명도 없다. 

그에게 오야붕(일본어로 ‘오야붕 親分’은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역주) 곁에서 보낸 세월은 여전히 인생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25세의 나이에 야쿠자가 된 그는 오야붕의 운전기사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했고 집 안 청소부터 옷 세탁까지 모든 집안일도 도맡아 했다. 게다가 마약 중독자였던 오야붕은 조금만 실수해도 마구 때렸고 마약 거래로 돈을 많이 벌어오라며 강요했다. 기노시타 타로는 한 달에 약 7,000유로 정도의 돈을 벌었으나 결국 2011년에 야쿠자의 세계에서 발을 빼기로 결심했다.

사회 복귀에 애를 먹는 많은 전직 야쿠자 조직원들과 달리 기노시타 타로는 꽤 쉽게 사회 복귀에 성공했다. 야쿠자에 들어가기 전에 건물 페인트칠 일을 했던 경력 덕분에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훨씬 자유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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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르몽드의 대표적인 자매지로 약칭은 "르 디플로"입니다. 국제뉴스를 다루는 월간지로 30개 언어로 51개 국제판이 발행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 아니 에르노,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피에르 부르디외 등 세계적 석학들이 즐겨 기고했으며, 국내에서는 한국어판이 2008년10월부터 발행되어 우리 사회에 비판적인 지적 담론의 장으로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일컬어 "세계를 보는 창"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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