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면역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2023, 조나단 글레이저)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경계와 인간성
영화는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가족을 조명한다. 그 푸릇푸릇한 세계에는 행복한 나날과 평범한 패밀리 드라마가 흐른다. 부하 직원들에게 존경 받는 아빠는 열심히 일하고, 엄마는 집과 정원을 살뜰히 가꾼다. 주말이면 피크닉을 가기도 한다. 아빠의 일터가 바뀌며 가족은 서로 떨어지게 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허나 그들의 대화와 웃음소리는 자주 소음처럼 느껴진다. 담장 너머의 ‘소음’이 귀를 파고든다. 이질적인 두 가지 사운드 흐름은 섞이지 않은 채로 한데 존재한다.
영화는 소리로 시작하여 소리로 끝난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사실’ 불일치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리 뒤에 깔려 있는 비명, 고함, 총성…은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듣지만 의식하지 않거나 무시하는(죄책감을 느껴 모르는 척 한다기보단 ‘당연하게 거기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담장 너머의 소리들이다. 정원과 마당이 딸린 가족의 집은 아우슈비츠에 있다. 벽은 높이만큼의 시각을 차단하지만 후각과 청각은 차단하지 못한다. 시각적으로도 ‘너머’는 완전히 차단될 수 없다. 낮에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채우고, 밤에는 불이 번져 창문에 비친다. 식료품을 나르는 이, 부츠를 닦는 이, 루돌프의 사무실에 불려간 이- ‘담장 너머’에 속하는 그들은 담장 안으로 들어오지만, ‘거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루돌프 몫의 술을 따라 (‘유대인의 물건’에 대한 가십을 나누는) 헤트비히 일행의 곁을 ‘없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지나 나르는 하우스키퍼의 모습과 닮았다. ‘존’을 가르는 것은 높은 담장이 아니다. 작품은 소녀가 ‘너머’의 공간에서 그레텔처럼 과일을 남기고 ‘안’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에서, 네거티브 흑백 필름을 통해 그 비물질적/비고정적인 경계를 드러낸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생존자에게 ‘이입’해 분노하고 슬퍼하며 ‘이야기’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