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필요할 때] 비우고, 기다려야 한 줄의 시구를 얻는다
2022/06/22
[문학 속 한 장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말테의 수기>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본 것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펭귄클래식, 9쪽
소설의 첫 문장은 종종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말테의 수기>(1910) 역시 그렇다. 말테는 덴마크 시골에서 당대 최고의 대도시이자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로 상경한 젊은 시인이다. 이러한 설정은 릴케가 조각가 로댕의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의 비서로 잠시 동안 파리에 머문 일을 반영한다.
발자크나 졸라 등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 파리는 출세와 욕망의 도시로 등장하지만, 말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수백 개의 병상이 있는 큰 병원에서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대해 그는 마치 ‘죽음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죽음은 병원에만 있지 않다.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거리에 나가 보았다. 여러 병원을 보았다. 한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배가 부른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높고 따뜻한 담벼락을 따라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가끔 담벼락을 더듬었다. 마치 담벼락이 아직 그대로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 담벼락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 너머에는 뭐가 있지? 나는 손에 든 지도를 살펴보았다.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다행이다. 사람들이 그녀의 해산을 도와주겠지. 그럴 거다.
9쪽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은 말테가 거리에서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줄곧 떠돌아다녔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도시와 도시의 어느 곳과 공동묘지, 다리, 그리고 뒷골목을 누볐는지는 하늘만이 안다.”(47쪽) 거리에서 그는,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병원 담벼락을 더듬으며 힘겹게 걷는 임산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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