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31편 - 엘도라도의 허영심이 반영된 미국의 서부 개척사, 골드러쉬(Gold rush)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4/24
13개 주(州)로 시작했던 미국은 여러 정책들과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서쪽으로 팽창해 나갔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의 시대를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렸다. 당시 미국의 백인들은 담배 농사에 필요한 새로운 농토를 찾아 서부로 이동했는데, 이러한 미국 백인들의 서부로의 이동은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디언들과 미국 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인디언 말살 정책을 통하여 미국은 토지를 강탈했다. 물론 인디언들은 그들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의 화력을 이기지 못했으며 인디언들의 참정권을 인정한 1930년대까지 미국 정부의 차별을 받으면서 살았다. 서부 지역으로 팽창한 미국은 캘리포니아까지 접근했다. 이 때 이주민인 제임스 윌리엄 마셜(James William Marshall, 1810~1885)은 캘리포니아 준주 콜로마의 슈터 밀에 이르게 되었다. 제임스는 1834년부터 아버지 필립이 사망하면서 뉴저지 주를 떠나 인디애나 주, 일리노이 주 등지를 돌아다녔는데 그러다가 1844년 미주리 주에 정착하였고 미주리 강을 따라 농사를 짓고 살게 된다.
사진 : Three men and one woman panning for gold during the California Gold Rush, 출처 : wikipedia

직후, 멕시코와 미국 전쟁이 1846년 5월에 발발하게 된다. 제임스는 곰 깃발 폭동이 벌어지는 동안 자원 입대를 하여 존 C. 프리몬트 대위의 캘리포니아 중대에서 복무를 했다. 1847년 초, 그의 중대를 떠나 농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축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도난당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임스의 유일한 수입원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제임스는 토지를 잃게 되었다. 제임스는 제재소의 건설을 위해 존 서터라는 인물과 동업하기 시작했고, 공장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통나무의 일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서터스 포트에서 64km 상류에 위치한 아메리칸 강에 공장을 건설했다. 아메리칸 강 상류에 공장을 건설했지만 공장의 수차에서 물을 배출하는 홈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아메리칸 강의 수력으로 굴착하기로 하고 매일 오전에 아메리칸 강의 굴착한 결과들을 조사하게 된다. 그러면서 1848년 1월 24일 오전, 제임스는 수차 바닥을 조사하다가 사금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금 발굴 소문이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1850년대의 미국 개척민들은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 주 등으로 몰려가게 되면서 골드러쉬(Gold rush) 현상이 생기게 된다. 

그 수는 무려 2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골드러시에 참여한 개척민들에게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고유명사까지 붙게 된다. 사실 사금의 첫 발견은 1848년으로 나타나는데 49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사금 소식이 동부로 전해지고 소식을 들은 동부의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에 도달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포티나이너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전적 의미의 포티나이너들만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 중 여성의 비율은 1/10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때 발견된 사금들과 발견된 물건들의 대부분은 황철광(Iron pyrite)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철광의 외관은 금을 닮아 강한 황금색의 금속 광택을 갖는 광물이다. 황철광은 유화광물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산출되는 광물인데 자원적으로 중요한 것은 흑광 광상, 동함유 유화철 광상이다. 유황 또는 유산의 제조 및 동광정련의 자용제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미국인들은 황철광과 금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금이 매우 많이 발견되는 줄 알고 좋아했다고 한다. 

여기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금 한 덩어리가 값이었다고 하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골드러쉬가 비단 미국 서부에만 행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골드러쉬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캐나다 밴쿠버나 호주, 라틴아메리카 브라질 등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골드러쉬가 존재했다. 사실상 엘도라도의 전설부터 일종의 원조 골드러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여진다. 당시 사금을 최초로 발견하였던 제임스 마셜은 스위스 출신의 상인 요한 수터(Johann August Sutter)와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시 스위스 상인이었던 수터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현 샌프란시스코의 땅을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로부터 헐값에 사들였다. 수터는 제임스에 의해 금이 발견되자 본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이 일구고 있던 낙농업 농장까지 관심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러한 금에 욕심이 생긴 수터는 금 채취에 몰두할 준비를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낙후성이 그에게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참고로 수터가 산 해당 지역은 당시에 러시아가 수터에게 헐값에 사들였고 그 해안가 남쪽에는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에서 차지한 땅으로 이 땅은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터에게 이 태평양 연안 지역들도 헐값에 팔아버렸다. 그러나 이 해양지역은 후일, 미국에서 가장 블루오션이 되는 땅이 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이 지역은 법보다 무력이 앞섰던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금을 채굴하기 위해 달려온 포티나이너들은 수터의 사유지에 침입해 허가 없이 금을 캐기 시작했고 수터의 농장들은 포티나이너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수터는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땅마저 뺏기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수터는 법정투쟁을 벌이게 되면서 1855년 캘리포니아 법원으로부터 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승소판결을 받아냈으나 포티나이너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폭동을 일으켜 법원에 불을 질렀으며 판사를 폭행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게 된다. 

오히려 수터는 이러한 미국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세 아들을 잃었다. 수터는 이후 20년이 넘도록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심장발작으로 1880년 사망하게 된다. 정작 골드러쉬의 수혜를 받아야 할 땅 주인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가족을 잃고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수터가 그나마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매우 우호적인 사이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이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목욕탕까지 건설하는 등의 오히려 학대 행위들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수터의 사망 이후로는 캘리포니아의 초기 개척자들 중 하나로 존경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차용한 마을과 시설들이 만들어졌으며 그의 동상들도 건설되었으나 최근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고 이에 대한 항의 시위의 여파로 인해 그의 악랄한 면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그를 미화하는 시설들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참고로 금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진 영지를 일찍 상속받은 존 오거스터스 수터의 아들 존 오거스터스 수터 주니어는 해당 영지에 새크라멘토(Sacramento)라는 도시를 설립하고 이후에 미국의 외교관으로 살았다. 금광을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극히 일부 성공한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 현실은 거의 전 재산을 잃고 거지가 되거나 아니면 파산하여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캘리포니아에 금을 캐러 온 사람이 아니라 금 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용품들을 파는 상인들이었다. 그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州)와 로스엔젤레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850년 7월 한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나타난 배가 500척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19세기 후반에는 대단한 부를 누리는 도시들이 되었다. 

그러나 골드러쉬의 유행이 시들해지면서 캘리포니아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급속히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전하면서 사람들은 거의 줄어들고 건물들만 남는 유령도시화가 진행된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미국의 유령도시로 특히 금 열풍이 불었던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지대는 골드러쉬의 유행이 줄어들자 그 여파로 유령도시가 제법 형성되었다고 한다. 골드러쉬 당시 죽은 사람들도 많지만 보통은 캘리포니아로 오는 길에 죽거나 사금을 채취하다 약탈당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때의 상황을 보자면 서로 금을 탈취하기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마구잡이로 털어가는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금을 찾으면 그 지역을 보호하려는 자들과 그 지역을 차지하려는 일행들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승자는 일행들을 밤에 죽이고 그 지역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금 매장지 하나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은 모두 사막 한복판에 버려졌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 중, 썩어가는 시체들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법자들이 생겨나고 이들을 주인공으로 제작된 서부영화 역시 대중매체의 중요한 소재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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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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