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뽑는 마누라 이야기

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6/29
비 오기 전에 통장‘업무’를 잠시 하고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선풍기를 틀고 잠시 벌러덩 누웠다. 
천천히 걸었는데 마라톤 뛰다 온 것처럼 할딱대는 숨을 정리한다. 늘어진 몸 위로 오락가락 빗소리가 들린다.
구름이 덮힌 컴컴한 방에 누워있자니 문득 시엄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피 뽑는 며느리, 아니 ‘피 뽑는 마누라’얘기다. 


호구지책으로 사는 곳을 자주 바꾸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엄니가 우리 집에 계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며칠 지내다보니, 당신 눈에는 돈도 안 되는 책들이 눈에 띄었나 보다. 아들이 뭐 그럴듯한 벌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느는 건 책 뿐인데. 보아하니 애들은 중, 고등학생이라 가르치는 대로 돈이 들어갈 텐데... 게다가 집도 한 칸 마련하려면 공부하면서 어느 세월에 집 장만을 할 것인가. 

   
"엄니, 애비 공부하면서 여직 살았어요.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것쥬~."
"그렇긴 허지만… 그러니까 옛날에, 공부하는 선비마누래가 말여, 자기서방이 하도 책만 디다 보고 살아서…."


또 시작된 옛날이야기. 그 얘기는 마치 당신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들을 때마다 나도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워낙에 총기가 출중했던 분이라 해마다 몇 번씩, 이 오랜 얘기를 둘째 며느리에게 들려줬다는 걸 기억 못할 리 없었다. 엄니는 당신 아들딸들의 생일은 물론 며느리 생일과 결혼기념일 까지 낱낱이 기억하는 분이었다.
   


"집안 살림엔 신경 안 쓰는 서방이 을매나 답답혀. 어떤 날은 끼니가 없어서 마누래가 밥을 얻으러 갔단 말여. 동네 이웃들한테 사정얘길 하고 밥을 얻어 오는 길에 비가 왔대. 아, 근데 집에 와보니께... 그나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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