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세계사] 분노와 연민 없이 흑인 노예의 내면적 삶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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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6

[문학 속 한 장면] 토니 모리슨  作, <빌러비드>

미국 역사의 오래된 흉터 ‘노예제’를 들추다

토니 모리슨은 예술적, 정치적, 역사적인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93년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에는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이미 70년대부터 꾸준히 집필활동을 해왔으며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소설과 에세이, 사회비평서를 써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미국 흑인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며, 이러한 의도를 정교하고도 서정적인 문장들로 구현해 낸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흑인 소설’ 또는 ‘노예 소설’로 한정하는 가운데,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모리슨의 소설은 예술성보다 정치적 메시지가 앞선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토니 모리슨이 흑인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여전히 따라다녔다.

그러나 모리슨은 삭제된 역사, 강요된 침묵을 지적한다. 미국사 서술에서 노예제와 그 아래 흑인의 삶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져 마치 각주처럼 처리 되었고, 흑인들의 삶과 경험을 다뤘다는 기록들은 대부분 백인의 후원과 승인 아래 쓰였기에 말하고 싶은 걸 다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흑인 노예를 다룬 서사들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식의 건설적인(?) 발언만이 허용되었다. “아시다시피 상황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를 없애고 계속 살아나갑시다.”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를 쓴 직후에 한 공식석상에서 자신이 받았던 질문을 언급한다. 인터뷰어는 모리슨에게 “입에 담기 힘든 미국 역사의 한 부분을 굳이 힘주어 말할 필요가 있는지, 그럴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안 좋은 기억을 피하거나 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고 일각에서는 이것이 진보적이며 건전하다고 여겨지는 마당에, 왜 시간이 덮어두었던 흉터, 켈로이드를,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전투를 굳이 들추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노예 집단은 죽고 없어지지 않았느냐, 흑인 집단은 살아 있지 않으냐, […] 아무리 훌륭한 책이로서니 […] 여러 겹의 흉터 조직을 벗겨내는 책을 써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묻는 것 같았습니다.

“노예 집단과 흑인 집단”, <보이지 않는 잉크>, 184-185쪽

하지만 입에 담기 힘든 역사에 대해, 안 좋은 기억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게 토니 모리슨의 입장이다. (흑인 노예제가 존재해온) 지난 30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말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말한다. “저는 노예제가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느낄 수 있도록 쓰고 싶었습니다. 역사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다가오도록 만들고 싶었지요.”(<작가란 무엇인가 2>, 320쪽) <빌러비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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