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와 치매는 노인의 여생을 어떻게 결박하는가

백승권
백승권 인증된 계정 · Writer & Copywriter
2023/10/25
비닐하우스


앞이 안 보이는데 기억이 흐려지면 언젠가 앞이 안 보인다는 사실도 잊게 되는 거 아니냐는 농담. 의사 친구를 향한 태강(양재성)의 농담을 듣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웃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이 안 보이고 기억도 잃어가는 태강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태강은 정신과 언어 기능이 온전치 않은 아내와 둘이 산다. 깨어있는 시간엔 간병인 문정(김서형)이 와서 끼니, 빨래, 청소 등을 살뜰히 챙겨준다. 아들은 처자식과 해외에 있다. 이따금 영상통화로만 안부를 나눈다. 태강과 문정이 대화할 때 시선은 마주치지 못하지만 둘은 서로를 깍듯이 대하고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노인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한다는 설정은 생경하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렇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태강 같은 성인 남성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신기했다. 생태계에서 사라진 종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강은 자신과 아내를 돕는 문정의 고마움을 잘 알고 있다. 금전으로 쉽게 환산하기 힘든 모든 곳에 손발이 가는 가사 노동의 버거움과 두 노인 환자의 케어가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별개로 태강의 여러 신체 능력은 퇴화 중이었다. 태강은 두려웠다. 어느 날 자신이 자신을 완전히 모르게 될 때 아내의 곁에 온전히 있지 못하게 될까 봐. 태강에게 그건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화장실 구석에 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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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writer. Author. 『저항 금기 해방-여성영화에 대하여』, 『너의 시체라도 발견했으면 좋겠어』, 『도로시 사전』, 『광고회사를 떠나며』, 『저녁이 없는 삶』 등을 썼다.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sk02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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