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아룬다티] 육체라는 이름의 사원, 헨젤과 그레텔이 먹어치울 (1편)

아룬다티
아룬다티 · 요가강사, 예술심리상담사, 퍼포먼서
2024/04/02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나- 한다.
죽음은 통합이다. 모든 삶의 완성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 ‘안 하던 짓’은 그동안 삶이라는 그림의 빈칸에 내내 채워지지 않던 마지막 퍼즐조각일지 모른다. 이를 우리는 ‘죽음의 전조’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통합의 힌트’라고 읽는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죽음의 전조, 아니 통합의 힌트를 따라 걷는 긴 여정일 것이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숲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주으며 걷는 것이다. 사실 동화속에서는 동물들이 다 먹어치워버려 그들이 놓은 생명줄 힌트는 완전히 사라진다. 안락하지만 구속이 지속되는 세속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렇게 무의식(동물)의 깔끔한 인도(引導)로 차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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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부스러기가 사라진 숲은 이제 완벽한 미로, 미궁이 된다. 미궁에 빠질 때에야 비로소 탐구라는 것이 시작된다. 길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생의 바닥 중 바닥에 빠진 상황. 미지가 주어져야 기지로 넘어가려는 ‘지혜’에 빛이 도는 법이다. 반짝. 그렇게 남매는 ‘없어진 부스러기’ 덕분으로 영적 탐구를 시작한다. 이들이 따라 걷는 것은 일종의 죽음의 전조, 통합의 힌트 부스러기. 걸어간 후에야 비로소 그곳은 길이 되며, 도착점에 다달아서야 목적지를 알게 된다. 미지에서 기지로 잘도잘도 넘어간다. 과자로 만든 집으로, 마녀를 만나러, 마녀에게 잡아먹히러. 제 발로.
마녀는 일종의 아니무스, 아니마를 모두 상징하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는  융(C. G. Jung)이 제시한 원형의 한 요소로,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적 성격 특성,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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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soma 소마)'이 주체가 되는 치유안내, 예술창작을 합니다. '마음예술 프로젝트(비영리)' 대표로 '아티스트 무브먼트' 등 예술치유프로그램 진행, '파자마프렌즈(방송)', '러쉬코리아(유튜브)' 등 매체에 출연, 강의했습니다. '몸'의 글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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