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앞에 선 인간의 종교성 : 플레이리스트 [친숙한 재난]

김터울
김터울 · 연구자, 활동가, 게이/퀴어.
2023/11/13
1973년 김지하가 쓴 연극 <금관의 예수>에 들어갈 삽입곡으로 작곡한 '주여, 이제는 여기에'로 플레이리스트의 첫 문을 연다. 종교를 갖지 않은 그였지만, 군부독재 시절 내내 쫓기는 몸으로 살았던 고통스런 세월을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처럼 인간이 본래 지닌 종교성의 깊이는 기성 종교의 틀을 거뜬히 넘어선다. 두번째 곡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성애 부부인 조동익과 장필순의 작품 ‘그 겨울 얼어붙은 멜로디로’를 담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그대 왜 그리 서둘러" 갔냐고, "이젠 그대보다 내가 더 세상을 오래 살았단 것을" 깨달았다는 가사는 언제 들어도 숨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다음으로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이 부른, 게이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케루빔 찬미가'가 흐른다. 이 곡은 본래 5세기 비잔틴 제국 시절 작곡된, 동로마 시기의 순교자를 기린 '성 요한 크리스스톰의 전례' 정교회 성가에서 착상된 것이다. 창세기의 천사 케루빔을 내건 곡답게 여기 이곳이 아닌 이계를 향한 숭고한 희구가 곡 전체에 묻어나온다. 그 다음 곡은 1365년 프랑스의 작곡가 기욤 드 마쇼가 렝스 대성당에 헌정한 노트르담 미사곡 중 일부인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절 렝스로 몸을 피해 이 곡을 썼을 그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이어지는 트랙은 16~17세기 활동한 히에로니무스 프라에토리우스의 대림 3주 영성체곡 '보라, 주님이 오실 것이다'로 뽑았다. 이전의 다성 성악음악에 이은 다성 관악 성가곡이 귀에 흡족히 감긴다.
다음은 김의철이 1970년대에 작곡하여 한영애와 양경숙을 거쳤다가 1998년 양희은의 목소리로 녹음된 '촛불을 밝혀요'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를 나온 양희은의 노래와, 모던한 민중·민족적 정서를 구현하는 김의철의 기타와, 가톨릭 남성 폴리포니 앙상블의 코러스는 실패하기 쉽지 않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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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2015), 『세상과 은둔 사이』(오월의봄,2021), 『불처벌』(휴머니스트,2022,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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