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48편 - 포르투갈을 경제 망국 만든 독재자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2024/04/27
EU에서는 근현대 시기의 정치와 경제 등을 두고 매년 각국의 역대 수장들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최상의 지도자 TOP 5와 최악의 지도자 TOP 5를 선정하고 있다. 작년 2023년의 최상의 지도자는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수상이고 최악의 지도자는 포르투갈의 독재자 올리베이라 살라자르(Oliveira Salazar, 1889~1970)로 뽑혔다. 포르투갈을 현재까지 서유럽 최빈국으로 만든 살라자르가 어떤 인물인지 보고 우리 대한민국도 그의 실책을 교훈으로 삼아 포르투갈처럼 경제가 폭망하는 국가로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살라자르도 통치 초기에는 썩 괜찮은 지도자였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지만 아버지는 엄격한 카톨릭 보수주의자로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카톨릭 신학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마음을 바꾸어 신학대학을 뛰쳐나와 코임브라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배우고 1916년에는 전공을 바꾸어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러던 도중1926년 안토니오 오스칼 카르모나(António Óscar Carmona, 1869~1951)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면서 살라자르에게 재무장관으로의 입각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군사 쿠데타 자체를 불법으로 여긴 살라자르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카르모나 정권이 포르투갈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목격한 살라자르는 생각을 바꾸어 1927년에 카르모나 대통령이 그를 재영입하려 할 때 모든 부서의 예산 지출에 대한 전권(全權) 부여를 조건으로 재무장관의 직위를 수락하고 정치권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매우 큰 업적을 세우는데, 100년 이상 계속된 포르투갈의 적자 재정을 흑자로 반전시켰으며,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포르투갈의 통화를 안정시켰다.
그 결과 포르투갈 시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게 된 살라자르는 카르모나 이상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카르모나는 1932년에 살라자르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카르모나의 권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으며 카르모나는 모든 권한을 살라자르에게 건네 주고 인사임명권만 유지했다. 한편 살라자르는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일당독재를 추진하였다. 새로운 국가라는 뜻의 에스타도 노보(Estado Novo) 운동을 진행했으며 하느님, 조국 그리고 가족(Deus, Pátria e Familia)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진행했다. 살라자르는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다르게 그는 경제학자 출신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인물이었다. 재임기간 동안 초기에는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경제를 회복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의회를 유지했으며 명목상 총리보다 서열이 높은 대통령직도 유지되었지만 대통령은 사실상 살라자르의 꼭두각시에 놓여 있었다. 대통령 직접 선거를 1958년까지 유지하여 국민투표로 당선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명목 뿐이었고 인기와 실권도 없었던 대통령이 살라자르를 총리로 계속 지명하였으며 당선된 살라자르가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자신의 심복이었던 움베르토 델가도(Humberto Delgado) 장군이 195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자 바로 1965년 대통령 선거를 억지로 간선제로 바꾸어 버렸다. 그는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인 포르투갈인들에게 대통령 선거는 전혀 쓸모없다(As eleições presidenciais são completamente inúteis para os portugueses que são como crianças.)"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결국 살라자르가 의회와 대통령직을 유지시킨 것에는 민주주의 대한 신념이 있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던 것이다.
살라자르는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 정책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3F 정책은 축구(Futebol), 종교(Fatima, 가톨릭),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민속 음악)를 일컫는 축약어로 살라자르의 이러한 정책은 후일 대한민국에게도 영향을 주어 전두환 전 대통령 3S 정책 (Sports, Sex, Screen)의 모델이 되었다. 살라자르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경제학이다. 본인이 코임브라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했었고 초창기에는 잘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포르투갈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20세기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낭만적 목가주의자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초반 치세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권력욕이 강할수록 초심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달에만 몰두했던 독재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포르투갈을 제조업 중심의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 서서히 관심을 줄여나갔으며, 근대적 산업 혁명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농촌 국가로 만드는 것을 추구하며 국민들을 무식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30여 년 동안 큰 풍파 없이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비결이었다.
20세기 초반 포르투갈 같이 남유럽 국가들의 산업화, 근대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자본가에게는 국가와 교회, 군대 등 기존 사회의 권위 집단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주었었고, 전통 사회가 해체되어 갑작스러운 구조적 생계 불안정화에 시달리게 된 대중에게 있어 결국 그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다수의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적인 성장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면 국민들이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이유가 없게 되고, 반대로 불균형한 분배와 과도한 양극화,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반체제 세력들이 나오면서 혁명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라자르와 같은 20세기 초반 유럽 대륙식 수구주의자나 카톨릭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형성된 교권주의자의 관점으로 볼 때 잘 되면 국민들은 근본이 미약한 자유주의 성향의 소비자들이 되는 형국이 되는거고 그들로 인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살라자르는 이를 매우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잘못되면 소위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산업화와 도시화였다. 그와 같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대부분 국가들은 전쟁과 주변 국가들의 위협 속에서 새로이 대세로 굳어진 총력전이라는 전쟁 양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란 과제를 필수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극심한 불안정을 야기한다는 것을 다른 서유럽 선진국들은 알면서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의 포르투갈은 총력전의 경험, 상호불신, 무한 군비 경쟁과 같은 현실에 직면한 다른 유럽 선진 국가들과 입지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강성했던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 제국이나 미국과 같이 패권 경쟁 할 수 있는 열강으로써 국력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포르투갈은 19세기 후반 앙골라, 모잠비크에 있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와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육로로 연결하려고 한 번 시도했으나 남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던 대영제국이 견제하면서 실패했고 식민지 확장 열강으로써 근대 시대에 이미 탈락했던 국가였다.
남아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같은 식민지들 또한 포르투갈이 통치한 지 적어도 400년 된 영토들이었기에 여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은 없어진지 오래다. 육로로 공격할 만한 적은 스페인 밖에 없었는데, 스페인은 당장 자국부터가 실패한 식민지 개발 시도, 이념분쟁,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내전 때문애 파국을 맞이한 상태였다. 바다로는 영국이 포르투갈을 우방으로 여기고 지켜주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식민지 인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제국주의 국가들을 몰아내 독립할 것이라는 발상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정적들에게조차 당대 최고의 교육 수준과 학식을 인정받은 살라자르는 보다 일찍 계급, 이념 대립을 경험했던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과 자국의 현실, 그리고 스페인 내전과 같이 파국으로 끝난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이 예외적으로 국제 지정학적으로 변방에 있다는 여건 때문에 20세기의 웬만한 국가들은 생각도 못했던 산업화 포기와 농촌 목가 경제 위주라는 사회적 안정을 선택했다.
특히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비교적 늦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대량의 국내 도시 이주민들이 발생했고, 알렌테주, 알가르브,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에서 리스본, 포르투, 바르셀로나 등 산업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노조와 라틴 문화권 특유의 도시 동네(Bairro) 문화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직접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직적인 국민국가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즘 성향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스페인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른 인민 전선 정책 이후, 적어도 1930년대 넘어서는 나름 필요에 따라 기존의 소위 반동 부르주아 정당들과도 교섭하고 공존할 수 있는 처세술을 부렸다. 각국 공산당들과 다르게 정규 조직원 100만, 방계조직 150만 운운하며 정당 정치인들이 총파업, 프로파간다, 대안 사회 인프라 운영 등을 통해 CNT 계열 아나키스트 급진 좌파들이 성장하며 국가를 말아먹었다. 이를 지켜본 살라자르 입장에서는 온갖 정치, 사회적 불안정 요소를 다분한 산업화와 이를 수반한 도시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살라자르는 배운 자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며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만 해도 지식인, 문화 인사 가리지 않고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사형을 남발했지만 살라자르는 내전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식인들을 제거했다. 프랑코식 제거 방식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우방이자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비폭력적 수단을 선호했던 살라자르는 반체제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초등교육은 보편화시켰는데 글을 쓰거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용인했다. 7 ~ 14세 아동의 문해율은 1930년에 33%였던 것이 살라자르 통치 하에서는 1940년 56%, 1960년에는 97%를 달성했다. 하지만 중등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냉담한 기조 정책을 유지했다. 다만 1960년대 들어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대학교도 세워주는 등 어느 정도 이러한 조치들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본국인 포르투갈의 교육 사정이 이와 같으니 당연히 식민지에서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앙골라는 전체 인구의 98% 가량이 문맹이었고 모잠비크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하였기에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이 파괴되어가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과 연합국 모두에 군수 물자를 수출하였고 그 덕택에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루는듯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가 대세로 자리 잡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 통치에서 벗어날 때,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은 영구한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논리를 펼쳐 해외 식민지에 집착했고 비로소 독립을 염원하는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과 식민지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많은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 군이 백인들의 지배 체제 유지를 노리던 인접 국가, 남아공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독립군 세력들에 승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다만 남아공, 로디지아와 붙어 있지 않았던 기니비사우에서는 남아공조차도 자국과 이해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독립군 세력들이 수도 비사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니비사우 영토들을 점령하며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포르투갈은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됨으로 인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다른 대륙의 국가들로 유출되었다. 특히 상당수가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하였는데 그로 인해 포르투갈의 최대 수출품은 포르투갈인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대항해시대에 하나님이 포르투갈 인들에게 요람으로 작은 포르투갈인 식민지 국가들을 주고, 무덤으로 전 세계를 주었다는 격언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지만 아버지는 엄격한 카톨릭 보수주의자로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카톨릭 신학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마음을 바꾸어 신학대학을 뛰쳐나와 코임브라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배우고 1916년에는 전공을 바꾸어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러던 도중1926년 안토니오 오스칼 카르모나(António Óscar Carmona, 1869~1951)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면서 살라자르에게 재무장관으로의 입각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군사 쿠데타 자체를 불법으로 여긴 살라자르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카르모나 정권이 포르투갈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목격한 살라자르는 생각을 바꾸어 1927년에 카르모나 대통령이 그를 재영입하려 할 때 모든 부서의 예산 지출에 대한 전권(全權) 부여를 조건으로 재무장관의 직위를 수락하고 정치권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매우 큰 업적을 세우는데, 100년 이상 계속된 포르투갈의 적자 재정을 흑자로 반전시켰으며,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포르투갈의 통화를 안정시켰다.
그 결과 포르투갈 시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게 된 살라자르는 카르모나 이상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카르모나는 1932년에 살라자르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카르모나의 권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으며 카르모나는 모든 권한을 살라자르에게 건네 주고 인사임명권만 유지했다. 한편 살라자르는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일당독재를 추진하였다. 새로운 국가라는 뜻의 에스타도 노보(Estado Novo) 운동을 진행했으며 하느님, 조국 그리고 가족(Deus, Pátria e Familia)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진행했다. 살라자르는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다르게 그는 경제학자 출신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인물이었다. 재임기간 동안 초기에는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경제를 회복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의회를 유지했으며 명목상 총리보다 서열이 높은 대통령직도 유지되었지만 대통령은 사실상 살라자르의 꼭두각시에 놓여 있었다. 대통령 직접 선거를 1958년까지 유지하여 국민투표로 당선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명목 뿐이었고 인기와 실권도 없었던 대통령이 살라자르를 총리로 계속 지명하였으며 당선된 살라자르가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자신의 심복이었던 움베르토 델가도(Humberto Delgado) 장군이 195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자 바로 1965년 대통령 선거를 억지로 간선제로 바꾸어 버렸다. 그는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인 포르투갈인들에게 대통령 선거는 전혀 쓸모없다(As eleições presidenciais são completamente inúteis para os portugueses que são como crianças.)"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결국 살라자르가 의회와 대통령직을 유지시킨 것에는 민주주의 대한 신념이 있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던 것이다.
살라자르는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 정책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3F 정책은 축구(Futebol), 종교(Fatima, 가톨릭),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민속 음악)를 일컫는 축약어로 살라자르의 이러한 정책은 후일 대한민국에게도 영향을 주어 전두환 전 대통령 3S 정책 (Sports, Sex, Screen)의 모델이 되었다. 살라자르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경제학이다. 본인이 코임브라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했었고 초창기에는 잘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포르투갈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20세기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낭만적 목가주의자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초반 치세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권력욕이 강할수록 초심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달에만 몰두했던 독재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포르투갈을 제조업 중심의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 서서히 관심을 줄여나갔으며, 근대적 산업 혁명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농촌 국가로 만드는 것을 추구하며 국민들을 무식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30여 년 동안 큰 풍파 없이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비결이었다.
20세기 초반 포르투갈 같이 남유럽 국가들의 산업화, 근대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자본가에게는 국가와 교회, 군대 등 기존 사회의 권위 집단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주었었고, 전통 사회가 해체되어 갑작스러운 구조적 생계 불안정화에 시달리게 된 대중에게 있어 결국 그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다수의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적인 성장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면 국민들이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이유가 없게 되고, 반대로 불균형한 분배와 과도한 양극화,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반체제 세력들이 나오면서 혁명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라자르와 같은 20세기 초반 유럽 대륙식 수구주의자나 카톨릭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형성된 교권주의자의 관점으로 볼 때 잘 되면 국민들은 근본이 미약한 자유주의 성향의 소비자들이 되는 형국이 되는거고 그들로 인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살라자르는 이를 매우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잘못되면 소위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산업화와 도시화였다. 그와 같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대부분 국가들은 전쟁과 주변 국가들의 위협 속에서 새로이 대세로 굳어진 총력전이라는 전쟁 양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란 과제를 필수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극심한 불안정을 야기한다는 것을 다른 서유럽 선진국들은 알면서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의 포르투갈은 총력전의 경험, 상호불신, 무한 군비 경쟁과 같은 현실에 직면한 다른 유럽 선진 국가들과 입지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강성했던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 제국이나 미국과 같이 패권 경쟁 할 수 있는 열강으로써 국력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포르투갈은 19세기 후반 앙골라, 모잠비크에 있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와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육로로 연결하려고 한 번 시도했으나 남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던 대영제국이 견제하면서 실패했고 식민지 확장 열강으로써 근대 시대에 이미 탈락했던 국가였다.
남아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같은 식민지들 또한 포르투갈이 통치한 지 적어도 400년 된 영토들이었기에 여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은 없어진지 오래다. 육로로 공격할 만한 적은 스페인 밖에 없었는데, 스페인은 당장 자국부터가 실패한 식민지 개발 시도, 이념분쟁,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내전 때문애 파국을 맞이한 상태였다. 바다로는 영국이 포르투갈을 우방으로 여기고 지켜주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식민지 인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제국주의 국가들을 몰아내 독립할 것이라는 발상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정적들에게조차 당대 최고의 교육 수준과 학식을 인정받은 살라자르는 보다 일찍 계급, 이념 대립을 경험했던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과 자국의 현실, 그리고 스페인 내전과 같이 파국으로 끝난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이 예외적으로 국제 지정학적으로 변방에 있다는 여건 때문에 20세기의 웬만한 국가들은 생각도 못했던 산업화 포기와 농촌 목가 경제 위주라는 사회적 안정을 선택했다.
특히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비교적 늦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대량의 국내 도시 이주민들이 발생했고, 알렌테주, 알가르브,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에서 리스본, 포르투, 바르셀로나 등 산업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노조와 라틴 문화권 특유의 도시 동네(Bairro) 문화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직접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직적인 국민국가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즘 성향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스페인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른 인민 전선 정책 이후, 적어도 1930년대 넘어서는 나름 필요에 따라 기존의 소위 반동 부르주아 정당들과도 교섭하고 공존할 수 있는 처세술을 부렸다. 각국 공산당들과 다르게 정규 조직원 100만, 방계조직 150만 운운하며 정당 정치인들이 총파업, 프로파간다, 대안 사회 인프라 운영 등을 통해 CNT 계열 아나키스트 급진 좌파들이 성장하며 국가를 말아먹었다. 이를 지켜본 살라자르 입장에서는 온갖 정치, 사회적 불안정 요소를 다분한 산업화와 이를 수반한 도시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살라자르는 배운 자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며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만 해도 지식인, 문화 인사 가리지 않고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사형을 남발했지만 살라자르는 내전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식인들을 제거했다. 프랑코식 제거 방식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우방이자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비폭력적 수단을 선호했던 살라자르는 반체제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초등교육은 보편화시켰는데 글을 쓰거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용인했다. 7 ~ 14세 아동의 문해율은 1930년에 33%였던 것이 살라자르 통치 하에서는 1940년 56%, 1960년에는 97%를 달성했다. 하지만 중등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냉담한 기조 정책을 유지했다. 다만 1960년대 들어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대학교도 세워주는 등 어느 정도 이러한 조치들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본국인 포르투갈의 교육 사정이 이와 같으니 당연히 식민지에서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앙골라는 전체 인구의 98% 가량이 문맹이었고 모잠비크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하였기에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이 파괴되어가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과 연합국 모두에 군수 물자를 수출하였고 그 덕택에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루는듯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가 대세로 자리 잡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 통치에서 벗어날 때,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은 영구한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논리를 펼쳐 해외 식민지에 집착했고 비로소 독립을 염원하는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과 식민지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많은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 군이 백인들의 지배 체제 유지를 노리던 인접 국가, 남아공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독립군 세력들에 승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다만 남아공, 로디지아와 붙어 있지 않았던 기니비사우에서는 남아공조차도 자국과 이해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독립군 세력들이 수도 비사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니비사우 영토들을 점령하며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포르투갈은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됨으로 인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다른 대륙의 국가들로 유출되었다. 특히 상당수가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하였는데 그로 인해 포르투갈의 최대 수출품은 포르투갈인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대항해시대에 하나님이 포르투갈 인들에게 요람으로 작은 포르투갈인 식민지 국가들을 주고, 무덤으로 전 세계를 주었다는 격언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