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57편 -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의 연해주 괴뢰정권 극동공화국 이야기, 일본의 연해주-극동 지방 괴뢰정권 동우크라이나 공화국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4/29
1918년 말에 일본은 7만 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5만 명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그 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이지만 일본에게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기회에 시베리아를 진출해 괴뢰정권을 세워 만주와 한반도의 완충국(Buffer state)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주는 오히려 볼셰비키에게 힘을 실어 주게 된다. 이는 일부 백군을 제외하고 다수의 극동 정치 세력들이 볼셰비키와 연대하며 게릴라 전술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르 강 하구의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에 일본군이 진주한 것은 1918년 9월이 되던 시기였다. 일본은 니콜라예프스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 국민을 이주시켜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아무르 강이 오호츠크 해와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수운(水運)의 거점으로 개발해 시베리아와 몽골 북부까지 지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초, 니콜라예프스크의 인구는 6,000명에 이르게 된다. 볼셰비키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던 러시아 백군도 이 도시로 몰려와 일본군과 요새를 함께 지키면서 볼셰비키의 진공을 방어한 것이다.
사진 : 극동공화국 행정 요원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1920년 1월 볼셰비키파였던 야코프 트랴피친(Яков Тряпицын)이 게릴라 4,000여 명을 이끌고 니콜라예프스크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군 350명, 백군 300명이 볼셰비키 군대에 대항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2월 24일 일본 주둔군 지휘관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러나 지휘관이었던 트랴피친은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전수칙이란 부분을 철저히 무시했다. 도시를 포위하고 우선 백군 지지자들을 끌어내 처형했다. 그러자 어차피 항복해도 죽을 것이라 판단한 일부 일본군과 백군은 항복에 응하지 않고 요새를 지키며 저항했다. 트랴피친은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저항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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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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