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 인증된 계정 ·
2023/10/11

반갑습니다. <댓글부대>야말로 21세기 한국 최고의 리얼리즘 문학이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천현우입니다. 저도 노동 소설을 집필 중인데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질문입니다. <산 자들>에 이어서 또 노동인데요. 노동, 좀 더 풀어서 ‘먹고 사는 문제’에 언제부터 꽂히신 걸까요? 인터뷰들을 검색해봐도 ‘집필목적’은 뚜렷한데 ‘집필동기’는 잘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규칙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 5년 이내의 현장, 취재를 토대로 한 사실적인 작성’인데요. 이 규칙을 다 지킨다면, 결과물이 왜 꼭 소설의 형식이어야만 할까요? 언뜻 봤을 땐 좋은 소설의 요건보단 좋은 기사의 요건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여기에 달아, 저는 ‘노동 문학’의 저변이 아주 얕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명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문에 언급하신 황석영 작가님의 <객지> 같은 근사한 노동 문학 작품을 보기 정말 어려워졌죠. 세상이 다층으로 쪼개진 이유도 있을 테고, 문학 자체의 퇴조도 이유일 듯한데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노동 문학이 정체한 원인’이 궁금합니다.

장강명 인증된 계정 ·
2023/10/11

(2/4)
제가 자주 겪는 일인데, 어떤 분들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일을 그 작동 방식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어떤 직원이 해고되거나 팀원 전원이 대기 발령을 당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할 때 저는 그걸 불가해한 재난처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는 왜 그런 일을 했는가를 현실적으로 그렸지요. 그랬더니 그걸 ‘사용자를 옹호한다’고 받아들이는 일부 독자들이 있더군요. 문단 어르신 중에도 있고, 젊은 평론가 중에도 있고요. 제 입장은 ‘사용자는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그냥 악마화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도, 인기를 모으는 데에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특히 『산 자들』을 쓰고 나서 위와 같은 일들을 겪은 뒤 노동 현장을 보는 한국 문학계의 시선이 낡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인은 악, 노동자는 선 같은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영세 자영업자 문제가 잘 거론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이분법으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시스템이 복잡해졌는데 그걸 잘 담아내지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모으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고, 일단 발품을 파는 현장밀착형 소설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뭐 착상은 그렇게 거창했습니다.

장강명 인증된 계정 ·
2023/10/11

(4/4)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시스템이라는 주제를 오래 고찰하다 보면 윤리의 문제에 이르게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몸집이 큰 시스템은 반드시 윤리를 필요로 합니다. 시스템이 어느 규모에 이르면 구성원 전부에게 이익을 약속하면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불리함을 감수하고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따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작동 방식에서 벗어난 구성원을 처벌하기도 하고요. 즉 큰 시스템들은 자신들의 작동 방식을 떠받칠 윤리를 채택해야 하고, 그럴 윤리가 없다면 발명해야 합니다. 윤리를 바라보는 한 태도이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근대 이전 사회를 종교가 떠받쳤고, 현대 사회를 계몽사상이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라는 대사에 20년째 꽂혀 있어요. 그 대사도 이런 맥락에서 소화합니다. 『표백』도 『재수사』도 저 대사에서 시작했고 아마 같은 주제로 장편소설을 최소한 한 편은 더 쓸 거 같습니다.

이현파 인증된 계정 ·
2023/10/12

장강명 선생님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성어린 질문과 답변을 읽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
2023/10/12

이런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어 반갑고 감사합니다.

1.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을 흔든다'고 하셨는데요. 
데이터 라벨러나, 거대 IT 플랫폼의 생리를 잘 알고 있고 내부 운영정책에 관여하는 프로젝트 관리자,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거나, 없애거나, 자신의 일마저 줄이고 있는 머신러닝 개발자 등의 직업 노동자에 대해서도 다룰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새로운 재난의 경계선에서 변화를 보고 느끼고 있는 직군들인 것 같은데,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누군가 꼭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동과 직업의 관점에서 잉여인력이 되는 사회가 온다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내게 될까요.
혹시 최근의 현상들에서 그 단초를 느낄 때가 있으신지요. 다소 무거운 질문인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이번 질문과 답변들을 통해 작가님의 주제의식을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어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강명 인증된 계정 ·
2023/10/11

@원진 님,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답은 @kse4783 님께 드린 답으로 갈음해도 괜찮을까요? 조금 보충하자면 신문기자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저널리즘 글쓰기를 무척 사랑하는 한편, 그 한계도 깊이 느꼈습니다. ‘사실적인 글’과 ‘사실을 적은 글’은 다릅니다. 저는 기자로서 후자를 쓰라고 배웠고, 저 역시 후배 기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말은 쓸 수 있지만(사실), 그 사람이 말하지 않은 내면은 쓸 수 없습니다(진실일 수는 있지만 사실은 아닌 것). 그리고 자기 내면을 요령 있게 말로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첨언하자면 좋은 스토리텔링 기사는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들어 언론사들이 본격적으로 시도한 기사 방식인데, 도입 배경은 좀 씁쓸합니다. 매체 환경이 인터넷 위주로 바뀌고 기사 베끼기가 쉬워지면서 스트레이트 단독 기사 경쟁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일종의 자구책으로 도입한 측면이 강합니다. 스토리텔링 기사는 기존의 역피라미드형 기사에 비해 취재에 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성과는 대체로 미약합니다. 내부에서 조회수를 체크해보면 연예인 사생활 잡담 기사가 늘 상위권이고, 긴 기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읽지도 않습니다(‘누가 요약 좀’이라고 댓글이 달리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보기에는 몇몇 언론들이 스토리텔링 보도를 잠시 시도하다 포기한 듯한 인상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시장 수요가 적고, 그만큼 제작 여건도 열악한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청자몽 ·
2023/10/11

여기 올라온 댓글도 훌륭하지만, 작가님이 달아주시는 대댓글도 좋아요. 굉장히 자세하게 깊이 잘 써주셔서! 감탄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글도 훌륭하고!

북토크를 온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강명 인증된 계정 ·
2023/10/11

(3/4)
여기서부터는 STS SF 이야기입니다. 저는 과학기술이 사회 시스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는 그 영향력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저는 21세기 선진국에서 어떤 정치인보다 더 소셜미디어가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증강 현실이나 데이터 예측분석 같은 기술도 사회 시스템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놓지 않을까, 거기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심들이 STS SF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착상은 늘 거창합니다).
그런 작품 안에서는 근미래에 등장할 기술들이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그려보려 했어요. 예컨대 증강현실이 극단적인 사회 파편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지금 쓰는 소설에서는 자율주행차를 소재로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에 줄 충격을 그려보려 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 세대 안에 현실로 다가올 문제일 겁니다. 반면 시간여행이나 초광속 이동, 초능력 같은 소재에는 그 정도 의무감 어린 관심은 들지 않더라고요. 당장 닥칠 것 같지도 않고, 제 상상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장강명 인증된 계정 ·
2023/10/11

@anthem99 님,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도 답을 잘 모르겠네요. 이렇다 할 통계도 없고, 제가 영상업계 전문가도 아니고, 취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말 같아 보이는 말’만 할 수 있을 따름인데요.
일단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 원작으로 소설보다 웹툰이 더 많은지 자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누가 제대로 세어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소설 신작과 웹툰 플랫폼에 올라오는 웹툰 신작의 규모도 다를 것 같고, 과거에 비해서 수치가 늘었다거나 줄었다거나 하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 같아요. 종편과 OTT가 등장하고 한국 영상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기본적으로 국산 영상물이 많아졌고, 소설 원작 영상과 웹툰 원작 영상이 양쪽 다 늘었는데 후자가 더 증가한 것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판권 판매 단계에서도 그러한지, 아니면 판권 구입 이후 제작 단계에서 비율이 달라지는지 같은 사항도 문득 궁금하네요.
그냥 최대한 심심하게 생각해보자면 영상물 제작에는 비용이 들고, 그러다 보니 검증된 원작이 더 투자를 받기 쉽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웹툰이 많으니 후자가 제작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웹툰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보다 많다는 것이 곧 웹툰이 소설보다 더 한국인의 욕망을 잘 건드렸다는 의미이고, 요즘 한국 웹툰이 요즘 한국 소설보다 더 한국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의미 아니냐,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인 거 같습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플랫폼부터 다르니까요.
이상 전제부터 결론까지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말 같아 보이는 말’이었습니다.

Guybrush 인증된 계정 ·
2023/10/12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 앤솔로지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노동 현장을 다큐가 아닌 문학으로 남기는 것은 작가마다 풀어내는 관점과 서사 방식도 중요할 텐데 기획하실 때 이런 부분도 동인분들끼리 모여 함께 협의를 하시나요? 아니면 각자 분야만 정리하고 소설은 철저히 작가에게 맡기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원고가 정리되었을 때, 동인분들께서 함께 읽으며 합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피드백을 나누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미 프로 작가님들이라 서로의 작품으로 의견을 나누기 쉽지는 않을 듯 한데, 동인으로 앤솔로지 작업을 한다면 또 필요한 부분일 거 같은데 실제 작업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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