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무관심할 자유는 없다
2024/04/16
잔소리하는 엄마를 내쫓으면 방이 조용해진다. 이제 간섭받지 않고 게임에 집중할 수 있다. 내 영역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롭다. 정말 그럴까? 내 방에서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행복을 즐길 수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 걸까?
오지랖과 눈치 보기에 지친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영역에 숨어들고 있다. 연애나 결혼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을 검열하고 통제해야 하는 활동과 멀어지고, 소득 격차나 약자 배제처럼 모두를 위협할 수 있는 사회문제에 냉담하고 있다. '타인에게 무관심할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은 결국 모두의 자유를 위협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모든 구성원이 타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을 항상 최우선 가치로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신의 자유를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
1. 교통사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유튜브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검색해 보면, 분노를 자극하는 교통사고 현장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누가봐도 술을 마신 것 같은 운전자가 옆 차로를 달리는 차를 급습하거나, 마음 급한 운전자가 뒤도 확인하지 않고 차로를 바꾸다가 애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가 흔하게 일어난다.¹
이런 사고들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다소 과격하게 보여준다. 혼자 서행한다고 해서 무사히 도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도로를 달리는 운전자 모두가 신호를 지키고 사이드미러를 살필 때, 안전 운전이 실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로 위 안전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
도로 위 안전 뿐만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옆 집 경리가 실직하면, 동네 치킨집은 단골을 잃는다. 윗 집 할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리면, 같은 교회에 다니는 다른 빌라 할머니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다. 그 치킨집 사장은 우리 엄마일 수도 있고, 교회 다니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오지랖과 눈치 보기에 지친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영역에 숨어들고 있다. 연애나 결혼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을 검열하고 통제해야 하는 활동과 멀어지고, 소득 격차나 약자 배제처럼 모두를 위협할 수 있는 사회문제에 냉담하고 있다. '타인에게 무관심할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은 결국 모두의 자유를 위협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모든 구성원이 타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을 항상 최우선 가치로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신의 자유를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
1. 교통사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유튜브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검색해 보면, 분노를 자극하는 교통사고 현장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누가봐도 술을 마신 것 같은 운전자가 옆 차로를 달리는 차를 급습하거나, 마음 급한 운전자가 뒤도 확인하지 않고 차로를 바꾸다가 애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가 흔하게 일어난다.¹
이런 사고들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다소 과격하게 보여준다. 혼자 서행한다고 해서 무사히 도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도로를 달리는 운전자 모두가 신호를 지키고 사이드미러를 살필 때, 안전 운전이 실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로 위 안전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
도로 위 안전 뿐만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옆 집 경리가 실직하면, 동네 치킨집은 단골을 잃는다. 윗 집 할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리면, 같은 교회에 다니는 다른 빌라 할머니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다. 그 치킨집 사장은 우리 엄마일 수도 있고, 교회 다니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무분별한 자기계발론과
자유방임주의에 맞섭니다.
법치국가와 사회연대를 결합하려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입니다.
더칼럼니스트 창간 1주년 기념 칼럼 공모전 당선
얼룩소 에어북 공모 1회차 선정 '함께 자유로운 나라' 출간
얼룩소 에어북 공모 6회차 선정 '좌업좌득' 출간
@이완 실체가 없다는 것은 공동체라는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부가 공유하는 믿음 정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다른말로, 공동체는 특정 개인에게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위 "사회화"라는 것을 교육하지요. 원래는 없는데 가상의 믿음을 주기위해서요)
이는 사회주의, 공화주의 등 어느식으로든 "공동체"를 가정하는 신념을 효용적으로 채택, 거부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통상 전제하는 공동의 이익, 미덕 따위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내가 그냥 믿고싶거나 이익이 된다고 하면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제가 "그게 나에게 어떤 이익인데"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니다. 물론, 본론에서는 장기적이익을 말하고 저도 그 측면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도 이익이 아니라면, 굳이 현상태를 왜 바꾸냐, 바꾸면 "나한테" 뭐가 더 좋은데 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것입니다.(누군가에겐 더 좋아도, "나"한테 더 좋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지요.)
물론, 내 자유가 위협될때는 타인과 연대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해도 스스로 존중감을 느끼는, 최소한의 생계는 해결하는 사회를 장기적으로 바라긴합니다. 다만, 사회주의나 공동체주의는 이 행동이 "공동선"에 부합되길 바라는게 문제이며, 운좋게 부합된다 해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동기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페널티(세금압박, 봉사강요)로 강제하는게 아쉽습니다.
@선량한시민 납세자가 탈세자보다 많고, 전선을 지키는 사람이 망명자보다 많습니다. 엄연히 다수 성공 사례가 있는데, 실패 사례에만 주목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사람 같은 정체성과 영역을 공유하는 무리끼리 '사회'를 이루고 삽니다. 엄연히 관찰 가능한 상호작용들이 있는데, 그게 실제하는지 의문스럽다는 게 무엇에 대한 의문인지 모르겠군요. 말씀하시는 '실제'의 개념이 뭔지, 눈 앞에 보이는 걸 의심할 만한 근거가 뭔지 모호합니다.
사회적인 행동 뒤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자기 정체성에 맞는 일을 했다는 만족감이 있을 수 있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사회적인 행동을 하도록 타고납니다. 이 점은 수 많은 과학자가 여러 번 밝힌 사실이죠. 다만 무임승차자가 있는 경우, 서로 신뢰하지 않는 경우 등 사회적인 행동이 붕괴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역시 과학적 사실이고, 그런 경우를 예방하는 것이 사회적 행동을 늘린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사례나 전염병 확산 사례 등 실제 사례를 통해 사람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20세기에 공중보건이 발달한 것도 미생물 탓에 함께 깨끗해야 나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구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나에게도 큰 불행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두고도 왜 내가 남에게 관심을 둬야 하는지 묻는다면 애초에 장기 이익을 위해 남과 협력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서로 기본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서 제가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은 듯합니다. 그걸 댓글로 다 남기기는 어려울 듯하니, 대신 제가 자주 참고하는 책을 추천드리겠습니다.
마크 모펫의 '인간 무리'는 사람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인류학적으로 밝히는 책입니다.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의 '블루프린트'는 사회적인 행동이 타고나는 본성이라는 점을 생물학적으로 밝히는 책입니다.
@이완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이익인(다만 단기적으로는 손해인) 어떤 일"을 공동선의 이름으로 강제할때 반발하겠지요. 또, 강제한다고 하더라도 강제로 수행된 일이 얼마나 잘 돌아갈지는 의문입니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양측의 전쟁피해 당사자들이 징집을 피하기위해 이민 혹은 망명하지 않았나요?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화주의에 납득하더라도, 막상 행동을 취하기 어려운점은 1) "공동체"라는게 정말로 실제하는지 의문스럽다는점, 2)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익이 항상 공동체의 이익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 같습니다.
특히, 2)의 경우, 내 이익을 보상할 어떤 조치가 없다면, 굳이 희생할 이유가 없어지지요. 때문에, 단기적이익(명예, 자본, 쾌락, 혹은 불안으로 부터의 구제)이 없다면 애초에 협력할 이유조차 사라진다고 봅니다.
즉, 아래를 동시에 만족해야 타인에 대한 협력이 일차적으로 가능한데, 그 어떤것도 쉽지않아보입니다. 본문은 A)를 납득시키나, 그렇다고 B)와 C)를 납득시키진 않아보입니다.
A) 그 행동이 장기적으로 이익이라 믿는것
B) 단기적으로 분명히 이익이 될것(명예, 자본, 쾌락 등)
C) B)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내가 치룬 대가를 보상 받는 시점까지 A)가 유지되고, 그때 얻는 보상이 대가이상 이라는 점을 믿는것.
저는 과학으로서 심리학을 꽤나 신뢰하기 때문에, 이코노미쿠스를 실제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타인과의 협럭이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완님께서 생각하실 때, 단기적이익/동기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타인과 협렵을 가능케 한다고 보나요?
또, 제시문에 따르면, 불안/외로움 등을 근거로 드는데, 그것이 생화학적으로 즉, 약물과 기타 의학적접근으로 조절된다면, 굳이 그 것을 해소하기 위해 먼길을 가야할 필요가 있나요?
@선량한시민 어떤 사람은 상호의존한다는 사실만 보고 협력할 동기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곧바로 동기가 되지는 않죠. 그래서 모든 사회는 자발성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강제로 세금을 걷고 전선에 내보내죠.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 이사야 벌린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도 자발성에 다 맡겨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개개인이 당장 협력할 동기를 느끼기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공공이익을 증진하는 일을 사회는 정당하게 강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강제에만 의존할 수 없는 점 역시 사실이라, 상호신뢰와 공동체 의식, 무임승차자 억제 같은 요소가 필요할 겁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말하는 단기 보상이 유일한 동기인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농사와 보험은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 사람들은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온갖 사회보장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지금 이익보다 미래 이익을 고를 줄 압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을 항상 강조합니다. 적어도 심리학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설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사회주의는 훈장이나 칭호로 동기를 부여하던 동구권 사회주의와 무관합니다.
이완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어느정도 납득은되나, 그렇다고 타인의 자유를 내가 굳이 신경쓸 큰 동기는 되지 않는것 같습니다. 직설적으로, (만약 내가 현재는 자유롭다고 인식할때) 타인의 자유?를 신경쓸 때 얻을 수 있는 "단기적 이익",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무엇인가요?
행동주의 심리학억 따르면, 보상이 빠르고 구체적이고 강력할 때 인간의 동기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타인의 자유를 신경쓸 동기를 얻을 수 있나요?
실제 사회주의에서는 훈장, 칭호와 같은 명예로움을 통해 동기를 유발했지요? 그런데, 한국은 그것조차 없는데, 과연 사람들이 행동할까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