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인증된 계정 ·
2023/10/10

@ryrl121233 견해 차가 커서 더 이상 말씀 나눠야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ryrl121233님 의견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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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칼란다라시빌리, 트랴피씬, 슈먀츠키
이런 핵심인물들은 한국사나 독립운동사 주제에 다룰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러시아 내전, 시베리아와 극동의 전개, 니콜라옙스크 사건 등 사건의 장소와 배경 등이 한국독립운동사와 전혀 무관한 역사들입니다.

독립운동사로 한정하면 핵심인물들이 주제에서 제외되는데, 독립운동사란 표기가 왜 옳다는건지 모르네요.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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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독립운동사라는 개념정의와 역사학계=한국사학계라는 표현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무장해제된 부대가 독립운동사와 전혀 무관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학자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편집위원회(소련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회) 위원이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푸틴의 독재정부, 소련에 대한 미화, 러시아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공산주의, 반서방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인물)가 저널에 게재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연구의 주제가 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은 자유시 참변을 지휘한 당사자이므로 자유시 참변과 직접적으로 연관
)에서 상해파 부대를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년 3월 11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https://m.fmkorea.com/best/3008795647)
DOI: 10.31518/2618-9100-2018-1-4

저자는 시베리아 지역과 소련의 정치적 탄압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이고, 한국역사학계와 독립운동사로 분류할 수 없는 역사학자입니다.

그리고 핵심적인 인물들도 독립운동사 분야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세계의 인간들입니다.

이문영 인증된 계정 ·
2023/09/18

@ryrl121233 그리고 다시 한번 살펴보니 신주백과 주미희의 논문에서 임시정부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점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문영 인증된 계정 ·
2023/09/18

@ryrl121233 말씀하신 부분은 윤상원의 논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유시 사변을 설명한 민족문화대백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제가 본 윤상원의 논문에서는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역사학계는 한국사학계를 포함하는 넓은 범위인데 그 사용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독립운동사라는 말은 "독립운동사 연구를 안 한다고 하던 유사역사가들, 어디 숟가락 좀 얹어보시지?"라는 곳 한 군데서 나오는데 독립운동사라는 말이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 발행하는 글이라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너그럽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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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한국이 아니라 시베리아 동부인데, 국사학계를 역사학계라고 지칭하는 게 맞는건가요? 한국사였다면 역사학계라고 지칭해도 문제없지만 발생지역은 한국사에 해당하는 지역이 아니지요.  특히 "독립운동사"라는 표현은 너무 어색하네요. 시베리아 지역의 문제를 "독립운동사"로 지칭하는 게 합당한건가요? 

제일 중요한 문제는 발생지역의 역사학계(러시아 시베리아) 연구는 언급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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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8

참고문헌으로 인용하신 윤상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박 일리야의 사할린 부대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부대가 아닙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pp.207-208.)

이문영 인증된 계정 ·
2023/09/06

@또또그런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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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6

덕일이가 홍범도 논란에 대해 드디어 입을 열었는데, 하는말이 가관입니다ㅋㅋㅋㅋ 이번 논란의 원인이 역사학계에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뉴라이트와 식민사학을 반복하는 역사학계의 주류세력들 때문이랍니다ㅋㅋ

그리고 이걸 또 전라도천년사랑 연결을 짓네요ㅋㅋㅋㅋㅋ

이문영 인증된 계정 ·
2023/08/31

@누군가의친구 아하, 제가 잘못 이해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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