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경 인증된 계정 ·
2023/04/18

남함페 측에서 꼭 답글을 달아 주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달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많이 부족할거라고 생각하거든요 ㅎㅎ 그리고 제 입장이 원글과 같지 않기도 하구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세상이 왜 이리 넓은지..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기분이 들 정도라 가운데에 있으면 동떨어진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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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지나가던 남함페 회원입니다...! 써주신 글에 관련해서 남함페 내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인데요, 일단 제 개인적인 의견을 살포시 남기고 가려구요.

1. 페미니즘은 여성-학, 즉 하나의 학문 분과입니다. 수학 선생님의 '집합'과 체육 선생님의 '집합!'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페미니즘 또한 내부에서 통용되고 있는 개념어가 있기 때문에 이 개념어의 오용을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성 혐오'를 들 수가 있겠네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으신 분들은 대부분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 여자 안 싫어하는데?"라고 반응하십니다. 하지만 여성 혐오는 misogyny를 번역한 단어로, 사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적이기 때문에 리더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아',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경찰을 할 수 없어'가 있겠네요.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에선 위와 같이 여성은 쉽게 '부적격'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이러한 현상을 표현한 개념어가 '여성 혐오'입니다. 

2. 성적 대상화의 경우, 아래 유영진님이 표현해주신 'objectification', 즉 사람을 사람이 아닌 성적인 도구(Object)로 격하시키는 일련의 태도와 시선들을 의미합니다. 성적 대상화가 사실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은 합니다만, 페미니즘계에서도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는 어떤 한 개인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볼 때 생깁니다. 상대방이 원하던, 원치 않던 그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제가 청소년 시절 듣던 얘기로 '여자가 옆에 지나가기만 해도 흥분할 나이다'...가 있었는데요, 이건 그 여성의 삶과 주체성을 깡그리 무시한채 순수하게 모든 여성을 내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가장 과도한 성적 대상화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런 성적 대상화는 곧 강간과 n번방 사건 등,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남을 찍어 누르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폭력은 대상화에 기반하고, 성폭력은 성적 대상화에 기반합니다.)

3. 페미니즘에서 성적 대상화를 문제삼는 건 '섹스하지마라'라던지, '쾌락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얘기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내 욕구를 총족시켜줄 수 있는 성적인 도구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만 바라볼 때 생기는 문제를 지적하는 겁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BDSM, 쉽게 얘기해 새디즘과 마조히즘을 바라보는 페미니즘계 내부의 논쟁을 흥미로와 하실 거 같은데요, 언제나 이런 얘기 속에서 중요한 건 관계의 형성 및 동등한 성적 주체로서 소통을 가져올 수 있는 '상호 존중'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른 동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상호 존중하는 상태에서 합의에 의해 SM 플레이를 한다면? 마조히즘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 새디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서로를 '성적인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 혹은 대상'으로 취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호 존중하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플레이를 그만 둘 수 있는 문장을 정하는 등의 규칙에 서로 동의합니다. 결국 사람 사이 모든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4. 여기서 리얼돌의 문제가 나옵니다. 리얼돌은 말 그대로 순수한 '성적인 도구'입니다. 리얼돌을 성적 대상화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뭔가 이상합니다. 이미 그 자체로 순수하게 성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되는 도구거든요. 근데 남성을 위한 리얼돌이 점차 실제 '여성의 몸'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ai나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현실 세계의 실제 여성'을 표현하려는 단계까지 나아간다는 얘기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실제 세계 속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사회와 여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마 이해하실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은 많은 경우 '성적 대상화'되고 있으며, 이는 남녀 간 소통을 막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 도구가 실제 여성의 몸을 닮아간다던지, 혹은 실제 여성을 표현한다?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지 않은 채 동일한 레토릭(여성의 몸은 남성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을 반복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다시금 실제 삶을 살고, 감정을 가지며, 스스로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성적 도구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있네요.

5. 더 나아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호 존중'과 '상호 동의'입니다. 결국 성관계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기반을 하구요(남자들도 '자기 여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닐까요?). 그런데 리얼돌이 점차 퍼지는 건.... 글쎄요, 소통 없이 내 욕구를 채우겠다는 태도 아닌가요...? 타인과의 교감과 소통을 포기한 채 나에게로만 침잠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나요...? 남함페는 사실 이런 세태에 있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자'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로서, 감정을 억압받고 제 깊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서... 아마 그래서 남함페 활동을 하고 있나봅니다.

밤이 너무 늦어서 두서없이 글을 쓴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관련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하루, 맘이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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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유영진 예 다른 얘기들은 다 어느 정도 된것 같긴 한데… 마사 너스바움을 독특하게 인용해 쓰셔서 조금만 덧붙이겠습니다(아마 <혐오와 수치심>을 읽으신 거겠죠?)

말씀주신대로 혐오와 두려움은 다른 감정입니다(물론 혐오와 수치심을 마치 인과처럼 쓰신 거 같아 이를 구분한 너스바움의 정의와는 조금 차이가 있어보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상상하시며 예시해주신 저 상황에선 남성의 성적 표현이 마치 오염물처럼 ‘투사’되는 것처럼 묘사하셨는데… 글쎄요 실제 많은 여성들과 이야기해보면서 들어보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결벽적이라기보단… 말씀해주셨듯 실존적 두려움(내가 원치 않는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에 가깝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데도 여성으로서 ’성적 객체‘로 소비되기 십상인 억압적 사회 혹은 공간에서, 무슨 말이나 어떤 시선을 받든 간에 ‘스스로 주체화하라’는 이야기는… 글쎄요 마스 너스바움이 이야기한 ‘분별있는 관찰자’의 태도는 아닌 듯 합니다. 

긴 댓글 감사드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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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넵 감사합니다! 게임 얘기를 하셨으니 조금만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사실 게임 같은 경우에도 조금 더 고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듯 합니다! 말씀주신대로 게임에서 상대방을 죽인다고 해서 이게 곧 '실제로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로 연결되진 않을 겁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다툼이 생겨 실제 사람이 죽는 경우는 있지요(흔히 '현피'라고 부르던데요...). 사실 게임에서 폭력성은 명확한 연결고리가 있다기보단 사람의 심리 근간에 깔린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승리와 패배가 짧은 시간 내에 명확하게 나뉘고, 승리한 자에게 강한 어드밴티지를 각종 방식으로 부여합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승리에 대한 집착'에 노출되다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승리를 방해하는 사람'을 모욕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고('트롤'), 모욕하는 태도는 또 다시 게임의 문화를 형성해 나갑니다. 즉, 게임이 폭력적일 수 있는 건 그 자체가 '폭력성'을 띈다기 보단 사람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만들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어떤 현상은 직접적으로 일련의 사태/사건을 만들기보단, 이렇게 간접적-혹은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책임이 모호해지는 거죠.... 사회 문화 자체가 사실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직접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살아온 방식이나 배워온 방식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하니 참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 그래도 페미니즘 공부하는 게 생각보다 나쁘진 않으니 책이라도 한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릴게요...!(저는 영상학, 철학에 이어 인류학으로 석사를 밟다보니 자연스레 여성학을 공부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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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8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개념을 자꾸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신체에 투사되는 상황' 그 자체로 광범위하게 재정의하는 게 아닌가, 내지는 그렇게 해석되기를 기대하면서 행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성부정적 페미니즘이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성긍정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옛날 빅토리아 시대 성윤리관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는 모욕마저 받았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너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때로는 페미니즘 진영이 종교인들보다 오히려 이 구절에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서구의 어떤 성긍정 페미니스트가 일갈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네 몸이 거룩한 성전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고, 내 몸은 재미있는 놀이공원이다!"

p.s. 참고로 저는 남함페 측에서 답글을 달아줄 가능성이 0% 에 수렴한다고 예상합니다.

김재경 인증된 계정 ·
2023/05/02

@유영진 @최창현 두분 덧글 잘 보고 갑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우연히 보게 되었네요. 동일한 사회과학 분야 내이지만 역시 각 분야마다 깊이와 넓이가 무궁무진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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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최창현 말씀 중에 "무슨 말이나 어떤 시선을 받든 간에" 부분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한번 더 첨언하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상황에서 주체화된 대응을 해야만 (그리고 저는 그것이 위해에 대한 분노로 표현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사회적 변화가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굳이 한번 더 재고한다면, 2015년~2018년 무렵에 여성들이 이미 미러링 등으로 분노 정서를 많이 표출했으나 뚜렷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자 집단적 무기력에 빠져서 공포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보니 공연히 너스바움을 끌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일반적으로 수치심의 정서보다는 공포(말씀하신 바 실존적 두려움)의 정서를 가지고 썰을 푸는 게 더 익숙합니다. 이번에는 너스바움의 수치심을 가지고 설명하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부적절한 적용이 되었던 것 같네요. 제가 공포로 썰을 푸는 걸 피했던 이유는, 다른 분들에게 영 환영받지 못할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쓴 글이 있어서 링크는 일단 걸긴 했는데, 그다지 일독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https://sw19classic.tistory.com/10

아무튼 긴 설명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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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1

@grr09 여러 상세한 설명 잘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상호 존중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성적 대상화를 문제시하는 것 자체는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사실 이런 정도 논리면 페미니즘까지 갈 것도 없이 시민으로서의 덕성에 호소하기만 해도 충분히 강조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리얼돌 문제를 우에노 치즈코처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소통의 부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페미니즘 내부에서 성적 대상화라는 단어를 훨씬 더 '폭넓게' 사용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봐서, 설명해주신 내용은 단지 그 수많은 의미들 중 가장 나이스한 일부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주지하시겠지만 성적 대상화라는 단어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주장들 중에는 '상호 존중' 이나 '소통' 같은 키워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중심적인 공간 내부에 머무르거나 혹은 남성의 단단한 신체(hard body)와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실질적인 강간과 같은 정신적 피해를 입으며, 가장 작은 성적 침탈을 겪은 여성의 내적 상태조차도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그것과 동일하다" 같은 주장이 있습니다. (이거 출처가 가물가물한데, 다른 분들이 아마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는 극단적인 일부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성부정론 진영의 내적인 철학이나 논리를 이어가고 이어가다 보면 다 무난히 도달하는 결론들입니다. 서구 운동가들 사이에서 영혼 살해(spirit murder) 같은 극단적인 표현들이 구호 외치듯 도는 것은 비단 SNS뿐만 아니라 대학 도서관에 꽂혀 있는 social justice 분야 학술서에서조차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놓고 왜 이렇게 표현이 극단적이냐고 물으면 성적 대상화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내 몸을 존중하지 않는 네 태도가 잘못됐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럽혀져선 안 될 내 고결한 몸이 더럽혀지는 게 참담하다는 결벽주의적인 의미에서 성적 대상화라는 단어를 들이대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자기 신체를 생기 있고 살아있는 주체로서 간주하는 반면, 후자는 일체의 오염을 허용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밀어넣고 석고상처럼 박제시켜 버리는 것인데, 제가 보기엔 이 역시 여성들이 드러내는 또 다른 '소통의 결여' 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적 대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부정 페미니즘 진영의 결벽주의와 도덕주의에 대해 푸념하듯 쓰기는 했는데, 담백하게 말하면 상대방을 주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목적(주로 성욕)을 위한 객체로서 간주하는 게 대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복잡한 동물이기 때문에 객체화와 주체화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습니다. 예컨대 어떤 이성 커플이 평소 서로를 대등하게 존중하면서도 유독 잠자리에서는 상대방을 객체로 취급하는 야한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럼 그 남성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럼 집 밖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분명히 존중하는 한편으로 남몰래 리얼돌을 이용하는 남성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까요? 더 나아가서, 이 논리를 근거로 리얼돌의 판매와 구매가 제한되어야 할까요?

요즘 도는 리얼돌 비판론에 대해 러프하게 나오는 반론이 매우 많습니다. 이를테면 "여성들이 찾는 딜도 중에도 '핏줄이 도드라지게 울끈불끈한' 것들이 있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남성들도 텐가처럼 추상적인 섹스토이를 즐기고 있고 여성들도 그런 적나라한 섹스토이를 구매하기도 하는데 뭐가 문제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 그냥 티키타카 하듯이 주고받는 논쟁일 뿐입니다. 이따금 매우 효과적이긴 하겠지만요. 여기서 핵심은 우리네 인간사가 너무나 복잡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리얼돌 자체에 대해 고찰하기에 앞서서 '무엇이 리얼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좁아지게 만드는가' 같은 인식론적인 고찰부터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남성의 성욕과 성생활의 양상이 그리 단순치 않다는 걸 유념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리얼돌 이슈를 '생존의 절박함' 이라는 미명 하에 파토내 놓으려는 저 결벽증적인 성부정론자들과도 거리를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단순치 않다는 것은, 첨언해 주신 게임의 유해성 논쟁에서도 드러납니다. 게임에 대해서 승리에 대한 집착을 키워드로 풀어가셨던데,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대개의 게이머들은 무조건 이기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질 때 지더라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승부를 펼치기를 원합니다. 이런 게이머들이 가장 치를 떠는 상대방은, 자신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는 상대방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하게 핵(hack)을 쓰는 상대방입니다. 게임에는 승패 이전에 그 승패를 가르는 규칙이 있고, 게이머들은 규칙을 준수하는 것과 질서의 중요성, 공정한 승부의 가치를 배웁니다. 언급하신 바 '승리에 집착하는 게이머' 모델은 일부 철없는 '핵쟁이' 들 외에는 설명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게임에 대해서 한번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생각거리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교수인 데이브 그로스먼(D.Grossman)은 자신의 저서인 《전투의 심리학》 에서 전투 상황에 돌입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분석했는데, 학교 총기난사 사건들에서 저자가 잘 써먹었던 범인 제압 노하우를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말인즉슨 범인이 교내를 돌아다니며 총기난사를 벌이고 있을 때 큰 목소리로 "게임 오버!" 라고 외친다는 건데, 실제로 범인들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이 총구를 내리고 순순히 잡혀간다고 합니다. 마치 목표했던 킬 수를 제한시간 내에 달성하지 못해서 게임 오버 화면이 뜬 것처럼 말입니다. 즉 게임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 규칙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공격성에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반대로 공격성의 불씨를 순식간에 꺼뜨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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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4

@grr09 사실 이렇게 긴 답글까지 예상했던 건 아니어서 조금 죄송스럽습니다. 서로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도록, 내용을 간소화해서 제 의견을 한번 더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요지는 상호존중이나 소통이라는 키워드에 기대지 않고 성부정론 그 자체에 입각해서 성적 대상화 개념을 활용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남성응시의 경우 상호존중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으나, 성부정론적인 수치심이나 공포감에 호소해서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전자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후자까지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미세공격성 이론은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론적 의의와 한계점을 모두 인식하고 있고, 굳이 더 깊게 코멘트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2. 당초 제가 주의를 기울였던 부분은 페미니스트 간의 성적인 대화가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남성 사이의 성적인 대화였습니다. 남성의 성적 표현이 자신의 신체에 투사될 때 그 페미니스트가 마치 '오염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저는 그것이 과연 스스로의 몸을 주체화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마사 너스바움이 통찰력 있게 지적했듯이, 오염되는 느낌(과 그로 인한 수치심)은 위해의 느낌(과 그로 인한 분노)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3. 네, 이 부분은 저 또한 이해했습니다. 앞에서 BDSM 부분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 같네요.

4. 최창현 얼룩커님께서 게임의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실 때 승리에 대한 집착을 키워드로 풀어가셨길래("이렇게 반복적으로 … 게임의 문화를 형성해 나갑니다"), 실제 게이머들의 경험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게임 규칙을 준수하려는 스포츠맨십에 더 가깝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어떻게든 승리에만 집착하는 게이머들이 없는 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은 상당히 소수이고, 게이머들은 그들을 '핵쟁이' 라고 부르며 매우 멸시합니다. 게이머들이 게임의 규칙을 따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총기난사처럼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이는 사람조차도 예외는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서툰댄서 ·
2023/04/21

@유영진 별도 글로 써주셨어도 좋았겠습니다. 댓글로 우리끼리만 보긴 아깝네요. 최창현 님 글도 그렇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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