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문학작품 같은 드라마. 하루끼는 <상실의 시대>에서 직접적으로 ‘상실’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면 독자들은 상실에 빠진다. 없던 상실도 생겨서 그것에 젖어 버리게 된다.
<나의 해방일지>도 꼭 이렇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해방은 이런 것이다,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추앙도 마찬가지의 선상에 있다. 차곡차곡 정성스럽게 세계를 만들고, 인물들을 빚어놓고, 그저 보여줄 뿐이다. 말이 쉽지 이런 작업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문학을 보면서 감탄 하고야 마는 것이다. 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서 써낸 거지?
물론, 이런 류의 화법은 확실한 단점이 있다. 젖어들기까지의 문턱이 몹시 높다는 것이다. 보통의 드라마는 확실한 장르를 가지고 승부를 보는 법이고, 최근의 난무하는 컨텐츠 홍수 속에서 그 장르가 몹시 모호함을 갖고 있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