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리뷰 그리고 다른 결말 -
2022/06/10
한편의 문학작품 같은 드라마. 하루끼는 <상실의 시대>에서 직접적으로 ‘상실’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면 독자들은 상실에 빠진다. 없던 상실도 생겨서 그것에 젖어 버리게 된다.
<나의 해방일지>도 꼭 이렇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해방은 이런 것이다,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추앙도 마찬가지의 선상에 있다. 차곡차곡 정성스럽게 세계를 만들고, 인물들을 빚어놓고, 그저 보여줄 뿐이다. 말이 쉽지 이런 작업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문학을 보면서 감탄 하고야 마는 것이다. 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서 써낸 거지?
물론, 이런 류의 화법은 확실한 단점이 있다. 젖어들기까지의 문턱이 몹시 높다는 것이다. 보통의 드라마는 확실한 장르를 가지고 승부를 보는 법이고, 최근의 난무하는 컨텐츠 홍수 속에서 그 장르가 몹시 모호함을 갖고 있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몇 회차까지 기다려 줄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 드라마는 초반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제법 희미하다. 여백의 미인지, 불친절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진행이 된다. 아마 <나의 아저씨> 작가 라는 후광이 없었다면, 이걸 믿고 기다려 주기는 분명 힘들었을 것 같다.
젖어들고 싶다, 그 순간이 도대체 언제일까, 를 수도 없이 외치며 봤다. 마침내 나 이제 빠져나올 수 없겠구나를 느낀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2화의 미정이의 날 추앙해요, 또 하나는 4화의 구씨의 달리기 이후의 비상하는 씬.
추앙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자세한 설명은 이미 써서 생략한다) 이 단어를 통해서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의 장르가 무엇인지 이렇게 말해준 셈이다. 이건 ‘추앙물’이야. 첨 들어봤지. 아무래도 그럴 테지. 그러니까 날 추앙해.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확 갈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를 추앙하기로 한 사람들과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