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나이키 그리고 지구 자본주의

한승백
한승백 · sbhan.net
2023/10/10
202년 2월 6일 작성

박연차, 나이키 그리고 지구 자본주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며칠 전 박연차 회장이 별세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박연차 게이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태광실업 회장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오디오 태광 에로이카를 생각했었지만, 그는 신발산업 종사자였고, 나이키 신발을 만들어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의 재산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데, 작년 기준 1조 916억 원, 한국 부자 38위다.

 박연차의 태광실업은 1980년부터 나이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60년대 나이키가 처음 ‘블루리본 스포츠'란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세계 신발 시장의 패권은 아디다스랑 푸마가 양분하고 있었다. 필 나이트도 아디다스 같은 모델을 동경했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낮은 단가로 신발을 생산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신발도 잘 만들고, 생산 단가도 낮출 수 있는 회사를 찾자 ~ 그래서 찾은 게 타이거 사다. 그렇다. 그 아식스 타이거. 일본의 아식스가 나이키의 첫 OEM 업체였다. 그래서 이렇게 똑같은 신발을 상표만 다르게 붙여 팔았다.

나이키랑 아식스는 78년 결별했다. 이유는 생산 단가가 높아져서다. 한국은 일본 다음에 나이키가 파트너로 삼은 나라였다. 필 나이트가 쓴 슈독에 보면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짝퉁 상품 때문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이키 짝퉁을 만들어 파는 한국 내 신발 업체를 고소하려다 품질이 좋아 차라리 한국에서 생산하자고 맘먹었다고.

그렇게 한국으로 시선을 돌린 나이키가 손을 잡은 업체가 ‘화승’이었다. 맞다 그 고무신부터 만들었다는, 기차표 신발을 생산하던, 왕자표와 함께 한국 신발산업의 양대 산맥 화승이 나이키의 첫 파트너였다. 박연차의 태광실업은 화승이 나이키의 수주를 받아 재하청을 준 업체였다. 그런데 화승과 나이키의 파트너십은 86년 끝이 난다. 이유는 나이키가 높은 로열티에 터무니없이 낮은 수출단가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승은 차라리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게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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