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 사건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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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된 항구는 세 곳이었다. 동해안의 원산, 일본과 가까운 부산, 그리고 서울의 관문 인천이었다. 이렇듯 인천은 첫 개항지였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배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항구다. 당연히 개화도 빨랐고, 수도 서울을 겨냥한 상품들의 유입도 분주했으며 공장들도 일찌감치 들어섰다. .유명한 ‘인천의 성냥공장’ 경우가 그렇다. 압록강 등지에서 실어온 목재들이 인천항에 들어온 뒤 성냥개비로 만들어져 수도권으로 뿌려지는 패턴이었다. 일제는 인천에 대규모 군수공장을 지었다. 생산된 완제품을 철도를 통해 간단히 항구의 배에 실을 수 있었으니 인천은 안성마춤의 공장 부지였다. 이렇듯 개항 이래 근 한 세기 동안,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인천 바닥에 굴러와 몸뚱이가 부서져라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고 꿈을 키웠다. .
한국 경제가 급성장했던 6~70년대에는 특히 그랬다. 경인가도에 즐비했던 공장들마다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