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물 사건의 영웅들 - 여성 노동자들과 사진관 아저씨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2/20
똥물 사건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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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된 항구는 세 곳이었다. 동해안의 원산, 일본과 가까운 부산, 그리고 서울의 관문 인천이었다. 이렇듯 인천은 첫 개항지였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배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항구다. 당연히 개화도 빨랐고, 수도 서울을 겨냥한 상품들의 유입도 분주했으며 공장들도 일찌감치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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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인천의 성냥공장’ 경우가 그렇다. 압록강 등지에서 실어온 목재들이 인천항에 들어온 뒤 성냥개비로 만들어져 수도권으로 뿌려지는 패턴이었다. 일제는 인천에 대규모 군수공장을 지었다. 생산된 완제품을 철도를 통해 간단히 항구의 배에 실을 수 있었으니 인천은 안성마춤의 공장 부지였다. 이렇듯 개항 이래 근 한 세기 동안,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인천 바닥에 굴러와 몸뚱이가 부서져라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고 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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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성냥공장
한국 경제가 급성장했던 6~70년대에는 특히 그랬다. 경인가도에 즐비했던 공장들마다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득실거렸다. 그 가운데에는 동일방직이라는 이름의 공장이 있었다. 동일방직의 원래 이름은 동양방적으로 일제의 군수공장 중 하나였다, 해방 이후 적산(敵産 : 미 군정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설립한 기업 및 소유했던 부동산, 반입했다가 가져가지 않은 동산 등을 총칭하여 부른 이름)으로 한국인 기업주에게 불하되어 동일방직으로 이름을 바꿔 가동을 이어가게 된다. 방직공장 성격상 공장 대부분의 노동자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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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조합원은 1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사건이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갔다(〈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박준성 지음, 이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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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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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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