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은 1,2 차 세계대전 즈음으로,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한 집사의 실존적 물음들과 성찰들을 그야말로 1인칭스럽게 서술해 나가는 소설이다. 36년을 달링턴 저택에서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사망 후 미국인 페러데이에게 ‘일괄거래의 한 품목’으로 매각되면서 여전히 그 저택에서 집사로 일하고 있다. 자신의 직업적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사적 실존에 넘기지 않으려는 데서 찾은 '품위'를 자기 생의 뼈대로 삼고 살았던 스티븐스는 주인 페러데이의 배려로 시작된 여행길에서 그의 지나간 날들, 그러니까 '남아 있지 않은 나날'들을 반추한다. 그 반추의 과정에서 보이는 1인칭 화자의 회상 속에는 영국적, 혹은 집사로서의 전문가적 자부심과 위대함에 대한 고뇌와 안간힘이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을 꼿꼿하게 떠받치던 뼈대로서의 품위가 놓쳐버린 것들, 예컨대 켄턴 양과의 사랑, 아버지의 임종,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