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월의 어느 쌀쌀한 날.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에 사람들이 대거 모였다. 지금과 달리 온통 흙구덩이였던 그곳에는 세 명의 미술 작가가 묻혀 있었다. 사람들의 물세례를 받고 땅 위로 나온 그들은 몸에 걸친 비닐 위에 글을 썼다.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거장),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 등의 문구를 쓰고 비닐을 벗어서 차례차례 불태웠다. 화형식을 거행한 셈이다.
이는 한국 미술사상 최초의 집단 해프닝인 <한강변의 타살>로 55년이 지난 지금도 미술계에서 의미 있게 다뤄진다. 군사정권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이런 행위예술이 곱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정권을 향한 불온한 태도로 인지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시도였다. 불태운 문구에 일일이 ‘문화’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은 그런 맥락으로 전해진다. 정권이 아니라 문화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