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비하인드 남북투쟁사 2 - 방콕의 어깨동무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9/30
오늘날 날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해 있으나 북한은 전쟁 이후 꽤 오랫 동안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1970년 남·북한 1인당 명목GDP는 북한 384달러, 한국 275달러로 북한이 109달러나 많았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공업시설이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1974년에 1인당 소득이 543달러로 처음으로 북한(515달러)을 앞섰다.” (한국경제신문 2015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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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배경은 수십년 간 유지돼 온 우위에서 비롯되는 북한의 우월감과 이쯤 되면 우리도 해볼만하다는 남한의 자신감이었다. “남한은 초승달이요 북한은 보름달”이던 시기였다고나 할까. 1974년 이후 남한은 고도성장을 거듭하며, 또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나라를 건설해 갔지만 북한은 점점 이전의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인 고립과 경제적인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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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도 그랬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남한을 압도한 북한이었으나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 경쟁에서 한국에 간발의 차로 뒤졌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메달 집계에서 남한에 밀렸다. 1978년이 저물기 전 남과 북은 또 한 번 스포츠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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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두 번째 벌어질 전면적인 남북한 스포츠 대결. 한국은 74년도 아시안 게임 때 북한과 16번 부딪쳐 11승 5패의 우위를 보였고 (필자 주: 얼마나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지 보시라) 특히 배구 농구 등 구기 경기에서는 5전 전승의 개가를 올렸다. 메달 수에서는 한국이 금 16 은 26 동 15개로 북한의 금 15 은 14 동 17을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승리, 이번 대회에도 북한의 전투적인 도전이 예상된다.” (경향신문 1978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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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다 200명이 넘는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고 양보할 수 없는 혈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어느덧 북한은 남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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