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1
2022/12/31
'트롤리 딜레마'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되어서 한창 유명했던 윤리적 논의입니다. 달리는 광차의 선로에 4명의 사람이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이대로 가면 곧 사망할 위험에 처해있지만, 레버를 당겨 선로를 바꾸면 그 대신 옆의 선로에서 작업 중인 인부 한 명이 사망할 것입니다. 이 때 레버를 당겨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우 레버를 당긴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환자의 올림픽 참가 역시 비슷한 논지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환자들은 안타깝지만, 그들을 허용할 경우 더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또 성전환자들의 신체적 능력이 우월하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쩌면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우 레버를 당긴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환자의 올림픽 참가 역시 비슷한 논지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환자들은 안타깝지만, 그들을 허용할 경우 더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또 성전환자들의 신체적 능력이 우월하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쩌면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결정에 폭탄을 달 때의 위험성
젊은 세대가 자주 하는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목에 폭탄 목걸이가 걸려 있다고 상상해봐. 틀리면 그 목걸이가 터져. 그럴 때 만약 내기를 걸어야 한다면 어디에 걸어?". 보통 내기나 예측 등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것을 상정할 때 쓰는 재밌는 표현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광차에 관한 딜레마는 이 질문과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급박한 상황과 회피할 여지가 없는 선택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게 ...
사회학을 전공했고, 더 공부하는 중입니다.
다양한 분야에 넓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해 글로 의견을 남기겠습니다.
네 의견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문제의식은 공감합니다.
다만, 공정의 잣대에서 판을 바꾸는 논의가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 환겸, 국가의 위상, 물려 받은 선천성은 "배타적 공정"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경쟁은 "불공정"하다는 억측도 가능해 지니까요.
단지 참여하는 모두가 납득이 되는 수준의 배타적 공정은 사회적 함의로 공정이라고 합니다. 사교육이 일반화된 요즘은 교육도 그 균형이 무너졌지만, 국가고시나 평가, 대입 수능이 용인되는 이이유겠지요.
말씀대로, 납득이 되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스테파노님의 고견 감사드립니다. 추가적으로 박 스테파노님께서 남기신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저는 스포츠에서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면서 제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합니다. 스포츠에서 배타성을 인정함으로써 공정함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이란 언제나 보장받을 수는 없는 가치입니다. 흑인이 백인보다 유리하고 금메달을 딴 많은 선수들은 본인만의 특별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유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사항에 대해서 '배타성'을 주장하며 경쟁에서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불공정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생각과는 다르게 모든 불공정이 배제된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불공정을 인정하고 어떤 불공정을 인정하지 않을지는 논의가 필요하고, 올림픽 정신에 따라 논의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에 근거할 뿐 아니라 사회적 기준이기도 할 것입니다
살짝 반대 의견을 남깁니다. "스포츠의 공정"은 "배타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동일 종목에 '체급'이 있는 이유입니다. 체급이 없는 무제한급 유도 경기나 예전 천하장사 이만기의 장사등극이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배타적으로 규정을 두고 규격화하는 이유는 "공정의 담보"입니다. 이를 정치인들은 요즘 "합리적 차별 제한"이라고도 하지요.
말씀대로 그저 트랜스젠더가 타고난 스포츠 생리학적 이득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참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언뜻 그럴듯 해 보입니다. 흑인, 백인 등 태상적 차별에 대한 예를 주셨니디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는 왜? 구분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의문과 반론의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의 공정은 타고난 한계를 인정하여 출발선을 차등하게 주는 규격의 배타성이 공정을 이루어 냈습니다. 10온즈 글러브나 6온즈 글러브나 다 통용된다면 결국 생리학으로 우생인 재재들의 잔치만 되는 것이지요.
연령 제한, 체급 제한, 성별 제한이 당연하다면, 래랜스젠더의 규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단 그 소수자들을 위한 또다른 배타적인 공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합니다.
네 의견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문제의식은 공감합니다.
다만, 공정의 잣대에서 판을 바꾸는 논의가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 환겸, 국가의 위상, 물려 받은 선천성은 "배타적 공정"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경쟁은 "불공정"하다는 억측도 가능해 지니까요.
단지 참여하는 모두가 납득이 되는 수준의 배타적 공정은 사회적 함의로 공정이라고 합니다. 사교육이 일반화된 요즘은 교육도 그 균형이 무너졌지만, 국가고시나 평가, 대입 수능이 용인되는 이이유겠지요.
말씀대로, 납득이 되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스테파노님의 고견 감사드립니다. 추가적으로 박 스테파노님께서 남기신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저는 스포츠에서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면서 제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합니다. 스포츠에서 배타성을 인정함으로써 공정함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이란 언제나 보장받을 수는 없는 가치입니다. 흑인이 백인보다 유리하고 금메달을 딴 많은 선수들은 본인만의 특별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유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사항에 대해서 '배타성'을 주장하며 경쟁에서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불공정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생각과는 다르게 모든 불공정이 배제된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불공정을 인정하고 어떤 불공정을 인정하지 않을지는 논의가 필요하고, 올림픽 정신에 따라 논의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에 근거할 뿐 아니라 사회적 기준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