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 - 천세진
바람이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을 들추자, 마른 시간이 한 움큼 부스스 흩어져 풀밭으로 달아나던 오후였다 햇살 아래서 연자방아에 매인 황소가 보리 낟알의 시간을 끌고 또 끌다가 제대로 뿔이 났고, 그림자에 황갈색이라도 입히려는 듯 말뚝처럼 버티고 있던 오후였다 석양이 달려와 달래지 않았다면 연자방아가 ‘쩍’ 소리를 내며 뿔난 황소 앞에 무릎을 꿇었을지 모르는 오후였다 잠자리들이 바람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낮술에 취해 옥수수 끝을 겨우 붙잡고 휘청대던 오후였다 대낮부터 술이냐고 말매미가 시끄럽게 잔소리를 해댔고, 잠자리들이 술기운에 온몸이 고추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중에도 잔소리를 피해 멀리 달아나버릴까 말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오후였다 아뿔싸! 그때 양털구름 떼가 이빨 긴 늑대구름에게 쫓겨 삽시간에 하늘이 난장판이 되었고, 양털구름 떼가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줄줄 쏟아내던 오후였다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