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애도연습] 헤어질 위기는 몇 번을 겪어도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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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 할머니와 아빠, 동생, 나 이렇게 넷이 살게 됐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였다. 아빠는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전국으로 일을 하러 다니셨고, 당연히 집에 자주 안 계셨다. 주로 어린 나와 동생을 돌봐주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어린이가 어린이다울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청소하기, 밥하기, 어른을 대하는 태도,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미리 배울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할머니를 잘 챙기는 내 모습에 어른들은 일찍 철들었다며 칭찬했지만, 그 뒤엔 불쌍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꼭 함께 덧붙여 말했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만족하며 살고 있었지만, 동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면 내 삶에 대한 만족감이 떨어졌다. ‘내가 불쌍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12살 되던 해부터 할머니의 치매가 시작됐고, 시간이 갈수록 약이 소용이 없을 정도로 인지 저하가 심해지셨다. 할머니는 낮에 냉장고 속 음식들을 전부 꺼내 음식물 쓰레기와 섞어 놓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12살에 시작된 돌봄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다리를 다치면서 휴학했던 나는 낮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를 보살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종일 옆에서 보살피는 간병인이 필요해졌다. 나는 일도 그만두고 학업을 중단한 채 끝이 안 보이는 돌봄에 전념해야만 했다.
 
돌봄을 선택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 관계와 사회관계가 단절되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자신의 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동정만 받을 뿐이었다. 친구들이 보인 태도가 이해된다. 가족의 돌봄을 당연하게 받으면서 자란 친구들에게는 정말 낯선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그 뒤로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 정말 배우고 싶었던 공부와도 멀어지게 되었고, 꿈에 대한 의지는 점차 흐려졌다. 나는 그렇게 돌봄 청년(영케어러)이 됐다. 돌봄 청년은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과 청년을 부르는 말이다. 그때는 이런 말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난 뭘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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