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서평] 세상은 좋아졌다,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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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2

By 홍성욱


인지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하 『선한 천사』)와 『지금 다시 계몽』(이하 『계몽』)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 “과거보다 지금이 더 살기 좋다”는 얘기를 하는 책이다. 합쳐서 말하면 “세상은 진보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핑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책을 두 권이나 썼다. 그것도 『선한 천사』는 1,408쪽, 『계몽』은 863쪽이다. 두 책을 합치면 2,250쪽이 넘는다. ‘벽돌책’도 이런 벽돌책이 없다.*

* 『선한 천사』는 무려 1.2킬로그램이다. 나는 이 책을 들다 손목을 삐끗하기도 했다.


핑커는 세상이 좋아진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낙관론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비판적인 성향이 강한 언론인과 대학 교육과 문화를 장악한 ‘좌파’ 지식인은 더 그렇다. 이들은 지금 세상의 문제를 들춰내면서, 세상이 타락하고 있으며 우리는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래서 이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핑커는 1,400쪽(Viking판 원서로는 802쪽)이 넘는 『선한 천사』를 썼고, 여기에서 우리가 과거와는 달리 전쟁과 폭력이 거의 사라진, 따라서 살다가 갑자기 죽을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주장했다. 선사 시대부터 중세와 근대 시기를 거쳐 현대까지 전쟁과 폭력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를 세밀하게 계산한 결과, 지금 전쟁과 폭력은 과거와 비교해 1/50에서1/100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우리는 가끔 3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느끼며 살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가 간 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 외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할 확률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핑커에 따르면, 지금이 바로 평화의 시대, 번영의 시대이다.

『계몽』에서 회고하듯이,(77-78쪽) 그는 이 『선한 천사』가 사람들의 편견을 바꿀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빌 게이츠가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호평했지만, 학계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뉴욕타임스》처럼 영향력 있는 매체는 핑커의 낙관론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도했다. 사람은 나의 불행을 남의 불행보다, 자신이 사는 시대의 고통을 과거의 고통보다 더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핑커는 『선한 천사』에 대한 비판이 이런 인지적 편견 때문이 아니라 더 크고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봤다. 비판자들이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책, 『계몽』을 썼다. 이 책에서 핑커는 지금이 전쟁과 폭력만이 아니라, 수명, 건강, 식량, 부, 평등, 환경, 평화, 안전, 테러, 민주주의, 평등권, 지식, 삶의 질, 행복, 실존적 위협 등의 다른 모든 잣대로 봐도 과거보다 훨씬 더 좋아진 세상임을 역설한다. 심지어 교통사고 사망자, 비행기 추락 사고 사망자도 확연하게 줄었다. 그의 무기는 숫자와 데이터, 이를 합친 그래프,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 같은 과학이다. 그의 철학적 기반은 이성, 과학, 휴머니즘,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두 책의 내용에 대해 따져 보기 전에, 책 제목부터 살펴보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제목은 마치 인지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핑커가 인간 본성에 근거해서 평화의 정착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핑커는 인간의 본성에 공격성, 복수심 같은 폭력적인 본성과 감정 이입, 협동, 이타주의 같은 평화의 본성이 공존함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후자가 전자를 누른 것은 수십만 년 동안에 호모 사피엔스가 더 선해져서가 아니라, 지난 몇백 년 사이에 폭력을 억누르는 제도와 사상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문명화 과정’의 이론을 빌려 와서 유럽의 근대 시기에 등장한 강력한 국가(홉스의 ‘리바이어던’)가 중세 사회에 만연했던 폭력, 살인, 린치, 야만을 잠재우고 세상을 ‘문명화’시킨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국가는 강력한 왕정으로 시작했지만,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했다. 여기에 자발적 교환관계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시장 체제가 결합했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의 물건을 강제로 뺏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야 했고, 이 점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폭력과 전쟁은 점차 억제되었고, 그러면서 20세기에 여성, 아동, 유색 인종, 동물의 권리도 점점 높아졌다. 국가,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끌어낸 힘이었다. 『계몽』에 따르면 이런 제도의 철학적 토대가 계몽사상이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꿈꿨던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계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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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문 계간지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국에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서평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탄생했습니다.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자연과학, 역사, 문학, 과학기술사, 철학, 건축학, 언어학, 정치학, 미디어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12명의 편집위원이 뜻을 모았습니다. 중요한 책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제대로 짚고, 널리 알려졌지만 내용이 부실한 책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주목받지 못한 책은 발굴해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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