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서거로 영국과의 오랜 유대 관계를 돌아보게 된 옛 식민지 국가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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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6
By 데미안 케이브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영국 식민지였던 일부 영연방 국가에서 독립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금 진행되고 있다.
1982년 솔로몬 제도를 비롯한 남태평양 순방 중 투발루를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출처: 게티 이미지/팀 그레이엄 포토 라이브러리

솔로몬 제도 호니아라 – 밀리센트 바티는 여러 해 동안 솔로몬 제도 곳곳의 구술 역사를 녹음하고 멜라네시아 문화를 알리며 조국의 탈식민지화를 위해 노력했다. 바티의 목표는 대영제국이 들여온 문화가 아닌 토착 문화가 우선시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아침, 바티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에 관해 질문을 받고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2018년 영연방 젊은 지도자 프로그램에서 여왕과 만났던 장면을 떠올리는 바티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물이 고였다. “저는 여왕을 참 좋아했어요,” 그녀는 버킹엄 궁에서 약 1만 5000km 떨어진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너무 슬퍼요.”

제국주의 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영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옛 식민지들은 자애로운 모습의 여왕과 때로 잔인했던 대영제국의 유산을 조화시키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영국 왕실은 역사상 어느 왕가보다도 많은 영토와 국민을 통치했고, 아직 군주제와 작별하지 못한 국가들 중 일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과거를 보다 온전히 마주하고 식민주의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에 속도가 내고 있다.

“군주제가 여왕과 함께 생을 마감한 것일까요?” 자메이카 태생으로 최근 캐나다에서 옛 노예식민지에서의 청소년 폭력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미셸 레모니우스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제 대화를 할 때입니다. 이야기를 나눠 볼 시간이에요.”

많은 옛 영국 식민지들은 56개국으로 구성된 자발적 연합체인 영국연방(영연방, Commonwealth)에 소속돼 있다. 회원국 대부분은 유사한 법률 및 정치 제도를 지니고 비슷한 역사로 얽혀 있다. 영연방은 스포츠, 문화, 교육 등의 분야에서 회원국 간의 교류를 장려한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비교적 최근에 가입한 소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포함해 특히 규모가 작은 신규 회원국에게 영연방은 선망의 대상이다. 영연방에는 공식적인 통상 협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수준보다 더 높은 관세율로 회원국들 간 교역이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의 영연방 회원국은 영국 왕실과 공식적인 관계가 없는 독립된 공화국이다. 그러나 14개 국가는 영국 국왕을 상징적 역할의 국가 원수로 규정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새로 선출된 의원들의 취임 선서를 받는 등 의식 상의 의무를 수행하는 총독이 군주의 지위를 대리한다. 그러나 1975년 정치적 갈등을 종식하고자 고프 휘틀럼 당시 호주 총리를 해임하는 등 논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찰스 왕세자가 이 모든 ‘영역과 영토’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됐지만,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 곳곳에서는 완전한 독립에 대한 요구가 더 대담하게 나오고 있다.
1961년 인도를 방문해 라젠드라 프라사드 초대 인도 대통령과 함께 한 엘리자베스 여왕. 출처: 게티 이미지/파퍼포토
토요일, 앤티가 바부다의 총리는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위한 국민투표를 3년 내에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호주, 바하마, 벨리즈, 캐나다 그리고 자메이카에서는 멀리 떨어진 왕국과 자국의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지난 수년간 격렬하게 진행된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카리브해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영연방 국민들은 묻는다. 왜 우리가 런던에 있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

식민지화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70년간 이어진 여왕의 통치가 끝난 후 벌어진 때늦은 심판이라 말한다. 작은 체구로 임무를 수행하며 지휘를 내렸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여러 폭력 행위를 자행한 제국의 이미지를 미소로 누그러뜨렸던 여왕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왕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는 여왕 덕분에 영연방이라는 퍼즐 전체가 잘 붙어있었지요.” 마크 맥케나 시드니대 역사학과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73세인 여왕의 장남 찰스 3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젊은 나이에 다른 시대를 살며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여왕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갖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여왕의 통치는 아버지 조지 6세가 서거한 1952년,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25세였던 여왕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돕기 위해 케냐를 순방 중이었다. 1953년 크리스마스에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한 연설을 통해 여왕은 영연방에 대해 자신은 “과거의 제국과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영연방은 우정, 충성, 그리고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숭고한 인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완전히 새로운 개념입니다”라고 여왕은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20개에 달하는 나라를 방문했다.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더 많은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 대영제국에 작별을 고한 식민지 하나하나를 찾아 6만 4000km에 달하는 순방에 나서기도 했다. 1974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1950년대에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1960년대에는 나이지리아가 그 뒤를 이었다. 스리랑카는 1972년에 공화국이 됐고, 바베이도스는 지난해 독립을 선포하며 가장 최근에 영국 왕실과 인연을 끊은 국가가 됐다.
지난해 11월 여왕이 바베이도스의 국가원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한 찰스 왕세자. 출처: 게티 이미지/제프 J 미첼
“영국 군주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식민통치 시대의 군주제에서 식민통치 이후 시대의 군주제로 진화하는 능력을 보여줬어요. 여왕은 왕실의 재창조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로버트 알드리치 시드니대 역사학과 교수는 설명했다.

영국의 많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여왕은 옛 식민지의 독립을 빠르게 승인했다. 때로는 포상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승인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1970년대 솔로몬 제도가 독립을 추진한 후, 여왕은 피터 케닐로리아 초대 솔로몬 제도 총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현재 의회 의원인 그의 아들 피터 케닐로리아 주니어는 당시 열 살이었다.

“무척 긴장했던 것도, 그리고 여왕의 미소로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도 모두 기억납니다.” 그는 말했다.

식민통치 시대의 깊은 상처가 남아있는 일부 국가에서조차, 여왕은 때로 무자비했던 영국의 통치와 여왕은 별개라는 믿음의 덕을 보았다. 1950년대 케냐를 통치한 영국 식민당국이 마우마우 봉기 가담자들을 고문했을 때도, 1955년 키프로스와 1963년 예멘의 아덴에서 반식민주의 저항 세력을 진압하던 영국군이 민간인을 상대로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을 때도, 비난의 화살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피해 갔다. “여왕은 그저 여성 군주로 보였죠.” 인도 역사학자 수체타 마하잔이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영국의 착취적인 식민통치 후에도 여왕은 인도에서 환영받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수십 년이 흐른 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엄 있는 가치를 합친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공화국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진 국가의 국민들 역시 여왕에 대해서만큼은 감정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왕은 단지 제가 태어난 나라의 입헌 군주에 그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하마에서 PR 담당 이사로 일하는 53세의 사라 컬비는 말했다. “저에게 여왕은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봉사할 수 있는지, 동시에 어떻게 나라의 근간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 놀라운 표본이었어요.”

그러나 여왕이 나이가 들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전세계가 식민지배의 과오에 대해 더 광범위한 조사에 나서자, 왕실이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 시절의 행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옛 식민지에서는 영국 왕실이 소유한 막대한 부의 바탕이 된 고통과 아픔, 그리고 약탈한 보물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지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여왕이 바베이도스의 국가원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찰스 왕세자는 옛 영국 식민지 바베이도스에 존재했던 “끔찍하고 잔혹한 노예제도”를 인정했다.
올해 봄 자메이카를 방문한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왕세자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군중. 출처: 게티 이미지/크리스 잭슨, 크리스 잭슨 컬렉션
올해 3월 자메이카를 방문한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왕세자비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맞닥뜨렸다. 8월에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가나의 나나 아쿠포아도 대통령이 유럽 국가들을 향해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발전”을 억누른 노예 무역에 대해 배상할 것을 촉구했다.

여왕이 서거한 지금, 여왕의 장신구조차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원석이자 여왕의 홀을 장식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위대한 별’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돌려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인도 언론은 영국이 인도로부터 탈취했다고 알려진, 여왕의 왕관에 장식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향방에 대해서 묻고 있다.

식민 지배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식민지화 노력은 식민 종주국 스스로의 몫이기도 하다. 많은 국가의 화폐에 여왕의 얼굴이 인쇄돼 있고, 여왕의 이름을 딴 병원과 도로가 존재한다. 스카우트 등의 단체는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세대를 육성했고, 많은 나라의 교육 제도는 여전히 영국 식민지 시대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식민통치가 끝났다는 것이 곧 탈식민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 아이들을 위한 스포츠 프로젝트 등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레모니우스 박사가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주군인 왕을 향해 있죠. 그 시선을 충분히 다른 곳으로 돌린 뒤에야 스스로를 돌아보고 재건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 생기는 겁니다.”
토요일, 호주 캔버라의 국회의사당 앞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동상 아래 놓인 화환. 출처: 게티 이미지/트레이시 니아미
일부 영연방 국가들은 군주제와 결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호주 국민은 절반 정도만이 겨우 공화정으로의 전환에 찬성하고 있고, 지난해 뉴질랜드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분의 1만이 공화정 전환을 지지했다.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죠.” 뉴질랜드의 역사학자 작 필립스가 말했다. 그러나 결국 왕위 승계는 새로운 군주를 맞이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영국과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공부한 31세의 바티는 여왕의 옛 통치 영역은 진화를 계속할 것이라 말했다. 서구의 사고방식과 토착민의 사고방식은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약 50년 전 여왕이 처음으로 솔로몬 제도를 방문했을 때 심은 카우리 나무는 이제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나무로 자랐다.

“기존 제도를 탈식민지화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서구의 제도를 들여다봐야 했어요.” 바티는 말했다. “이것은 조화의 문제더군요.” 아마도 그 과정은 여왕이 구현하려 노력했던 가치로부터 출발할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여왕이 지킨 가치, 그리고 우리 젊은 세대가 계속 받아들여야 할 영속적인 유산은 바로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티는 말을 이었다. “여왕은 자신의 복무를 충실히 이행했어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매주 5회, 뉴욕타임스의 보도 기사와 칼럼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 이 계정은 alookso에서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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