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필요할 때] 침묵과 망각의 폭력에 맞서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
2022/06/20
[문학 속 한 장면] W.G. 제발트 作, <이민자들>
제발트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라는 공적 담론 장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 되지 않은 것들이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딱히 주목받을 이유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개인들의 이야기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민자들>에서 그가 조명하는 인물들은 역사의 비극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또는 어쩌다 보니 한 발짝 비켜서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역사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와해되어 간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의 ‘유령적 존재’로, 마음-영혼이 완전히 헐어버린 ‘잔해’와 같은 존재로 남는다. 특히 제발트는 한 개인의 마음이 천천히 소멸해가는 과정을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맨체스터, 예루살렘), 유명 휴양지의 호텔이나 유대인 거주지 같은 장소들, 어떤 풍경, 어떤 산업이 쇠락하고 소멸하는 과정과 겹쳐놓는다. 이 두 가지 잔해의 풍경들은 서로 공명하며 큰 진폭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사람의 영혼의 파괴가 결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역설한다.
제발트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이다. 그는 전쟁과 아우슈비츠 경험을 손쉬운 방식으로 강조(악마화)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비극이 개별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설득력 있게 서술한다. 동시에 그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몹시 허약하고 불안정한very frail and unsteady”(131쪽) 모습으로 살다간 사람들에 대한 최상의 예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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