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의 ‘화려한 휴가’

장성려리
장성려리 · 사진가/르포라이터/프리랜서 기고노동자
2021/10/23
2015년 4월 18일, 광화문 광장 북단. ©장성려리
박정희가 죽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당연히 권력에는 진공이 생겼고, 권력 블록 내부에서도, 블록 외부에서도 그 진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진공은 한 달 반 여 만에 진압되었다. 마치 죽은 박정희가 생전에 권력을 잡았던 것과 비슷한 방식, 바로 쿠데타로 말이다.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프라하의 봄’처럼 서울에도 매캐한 봄이 찾아오는 것 같았지만, 그 짧은 봄을 뒤로 하고 전두환은 5월 17일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쿠데타의 타겟은 내각과 행정부였고, 목적은 계엄령의 전국적인 확대였다. 그것이 성공한 후 전두환은 목적대로 계엄령을 전국에 내리고 휴가를 떠났다. 바로 ‘화려한 휴가’를 말이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화려한 휴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할 것이다. 당시 영남 지방은 박정희 정권의 수출 위주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거대 독점자본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산업 연관 효과가 컸다. 그래서 중공업이 비교적 손쉽게 발달할 수 있었다. 유신 체제는 외부에서 기인한 경제적 위기를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극복하려던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제조업 전반에 걸쳐 500인 이상의 대기업이 1969년에는 189개에서 1977년에는 587개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대개 영남에 집중되었는데 반대로 호남, 특히 광주・전남 지역은 경제성장에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산업화로 인한 이농과 탈농 현상이 가장 심했던 맥락적 문제(Contextual Problems)를 안고 있었던 지역이다. 동시에 박정희 정권의 차별로 피해의식이 컸기 때문에 학생 중심으로 ...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구직활동을 하고 하루하루 금주 카운트를 늘려 나갑니다.
19
팔로워 69
팔로잉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