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은 고의 또는 무지로 인해 경제의 본질적 요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가 기술에만 상관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고, 공동체의 집단적 사건일 뿐 아니라 개인적 사건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누가 얼마나 보상을 가져가는가, 그 보상이 정의롭다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가,
높아진 생산량/생산성만큼 향상된 소비 능력은, 그러나 진짜 소비 능력인가, 곧 물가 인상률을 임금인상이 따라잡는지, 새로운 소비형태나 삶의 만족의 척도가 변경되는 일은 없는지 등을 모두 생략한 우화입니다.
크루그먼은 물리적 변화를 원인부에 놓고, 결과부는 그에 따라 저절로 순연돼 발생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경제는 물적 변동뿐 아니라 인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누가 얼마나 보상을 가져가는가, 그 보상이 정의롭다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가,
높아진 생산량/생산성만큼 향상된 소비 능력은, 그러나 진짜 소비 능력인가, 곧 물가 인상률을 임금인상이 따라잡는지, 새로운 소비형태나 삶의 만족의 척도가 변경되는 일은 없는지 등을 모두 생략한 우화입니다.
크루그먼은 물리적 변화를 원인부에 놓고, 결과부는 그에 따라 저절로 순연돼 발생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경제는 물적 변동뿐 아니라 인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우선, 권승준 얼룩커 님, 답글을 읽고 의견을 주시어 고맙습니다. 얼룩소 시스템을 여전히 익혀 가는 중이어서 답글 주신 것도 방금 전에야 발견하고 알아챘습니다. 답변 드리는 게 늦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양해해 주기를 청합니다.
답글에 이어서 답글을 달 수 없어 원 게시글에 답글을 달면서, 원 게시글에 대한 답글과 구분하기 위하여 권승준 님께서 답글에 달아주신 답글을 아래 첨부합니다:
“저는 크루그먼이 고의나 무지로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누락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편입니다 ㅎㅎ 다만, 크루그먼의 우화가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어던 거대한 현상을 심플하게 설명하려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 같기도 합니다. 충환님 생각에는 기술발전으로 생기는 보상을 누가 가져간다고 보시나요?”
폴 크루그먼이 고의 또는 무지로 이 우화를 만들지 않았을 거라는 취지의 말씀에 대하여;
권승준 얼룩커 님과 저 양쪽 다 크루그먼의 진짜 의도와 생각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에게 직접 묻지 않았고, 또 (이런 태도는 지나치게 '현대인'스럽지만) 크루그먼에게 묻고 대답을 듣는다 해도 그가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심지어 그가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다시 문제삼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크루그먼의 생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정확하게는 우리가 크루그먼이라는 자연인이 아니라 공적으로 발화한, '발행된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때문이겠지요. 그의 견해가 더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장에 놓인 공견(公見)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의 말과 글을 어떻게 알아듣는가가 독자적 가치를 지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말했는가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알아들었는가에 의해 의미가 정의되고 쓸모가 정해질 테니까요. (저 역시 이 실험에 동의하고 기대를 갖고 참가하지만 동시에 걱정이나 의심이라고 부를 만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공적 글쓰기와 사적 글쓰기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쩌면 둘이 결합하며 새로운 글쓰기가 탄생하는 중이지만, 여전히 공공연하게 쓴 글이, 또 조금은 인터넷 초기 제로보드 방식 게시판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얼룩소라는 장이 어떻게 읽힐지 완벽히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설이 길었지만 크루그먼이 ‘고의 또는 무지’하였다고 제가 쓴 까닭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가 그 우화를 그렇게 써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그 정도는 그가 경제에서 인간의 영향을 또는 인간을 향한 작용을 과도하게 단순하게 이해 또는 이해하고 말게끔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경제의 본질이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리라는 점은 그가 쓴 다른 글과 발언 들을 통해 저 또한 인정합니다. 노조에 대한 그의 관점, 비슷한 경제 규모와 비슷한 산업을 발달시킨 나라 사이의 무역을 설명하며 생산성뿐 아니라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선호를 도입한 것 등에서 그가 아마도 인간에 대한 높은 이해와 깊은 통찰을 하고 있고, 꾸준히 궁리해 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경제에 전문적 식견을 갖지 않아 엄격하게 보자면 이 문제에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까 자문하기도 하였지만, 앞서 쓰기와 읽기에 대해 언급한 관점의 연장으로 독자성이 작품에 대해 결국 저자성을 능가한다고 보기 때문에 일반 시민, 또는 일반 소비자, 경제 체제에 들어가 [생산과 소비 양편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일개인으로서 깊든 얕든 발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무튼 과문한 저로서도 크루그먼을 통째로 경제에서 인간의 일을 배제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글을 조금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길은 크루그먼의 이름을 지우고 크루그먼이 만든 “그 우화는”이라고 논평 대상을 바꾸는 것일 테고, 다른 하나의 글은 크루그먼을 다시 강하게 부르며, 그만큼의 역량을 갖고, 그만큼의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이런 우화를 썼을 때, 그가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았거나 나중에 반응을 보고 알았는데 정정하거나 보충하지 않는다면 무책임하거나 또는 그 우화를 그렇게 읽는 것이 사실은 그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여겨서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고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삼의 길도 있습니다. 크루그먼은 이제 그 문제를 시정하기에는 기력이 부친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화가 등장하고 퍼진 시점을 생각할 때 그는 여전히 왕성한 동안에도 이걸 ‘제대로 통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술발전의 보상을 누가 가져간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이 질문에 저 스스로 쾌도난마나 활연대오한 답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또는 집중하는 지적 활동이, 다시 말해 현실을 우리 정신에 편입하는 인간 활동이 ‘물리학’이라면, 정반대로 끝없이 빠르게 확장하여 계속해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경제’요, 그것을 해석하고 모형을 만들거나 그 안에서 결과를 조작하든지 예측하든지 하는 것이 ‘경제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복잡계인 현실에 걸맞은 복잡성을 지닌 경제에서 성장과 분배, 들숨과 날숨으로서 순환 법칙을 간단히 해명하고 정의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불완전한 지점에서 누군가 이어 가든, 잘못 노정한 것을 부수어서 새로 길을 놓든, 아니면 그냥 없는 것처럼 버려 두든, 그건 제 몫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몫이며, 저는 맞든 틀리든, 맞기를 바라고 기대한다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누추한 집에 모시듯 변변치 못한 생각을 던져 봅니다.
들으나 마나한 대답이기는 합니다. <시스템을 아는 자, 시스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간다>. 보상은 결코 일대일로 주어지지 않고,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시스템에 의해 가감하며, 경로를 변경해서 주어집니다. 만약 공로자 자신이 직접 수혜자가 된다고 관찰되거나, 공로자가 기여코자 한 상대가 정말로 수혜자가 되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더라도 보상이 일어나는 ‘회로’는 그 사이에 있어, 눈에 보이는 보상이 매개 없이 직접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과정’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으며, 기술발전이라는 제공자와 보상받는 수혜자 또는 기여자가 일치하거나 기대대로 연결되더라도 이 회로를 찾아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회로를 알고 있거나, 따로 알 것도 없이 보상 회로의 중간에 연결된 이들은 보상을 왜곡하고 편취할 위험이 상존한다고 봅니다.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대한 직접 노동의 결과로 얻는 것들 외에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한 회로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적’이고 ‘사회적’입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가치 중립이란 이미 작동하는 회로에 손대지 않겠다는 것으로서 이미 발생하고 방향을 지닌 가치의 흐름을 정지한 것처럼, 운동량이 0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일입니다.
기술발전의 보상을 누가 가져가느냔 질문은 애초부터 그것이 “정의로운가?” 하는 물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묻지 않았대도 그렇게 물음을 듣기 마련입니다. 이런 게, 사람들 사이에 놓인, 어쩌면 애초에 생물학적으로 아니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인간에게 미리 설치된 회로일 수조차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보상을 누가 가져가는가’라는 물음[what question]은 실은 '보상을 누가 가져가야 하는가’라는 물음[why question]이고, 여기에 답하는 과정은 기성의 것과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든 폐기하거나 변경하는 것이든 대안으로 내는 것 양편으로 ‘보상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가’라는 물음[how question]을 내포하거나 확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여러 경로로 참여해 지분을 갖고 보상을 나누어 갖는, 혹은 [판마다 따로] 독점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답하는 대신, 어떻게 보상해야 하고, 무엇을 누구에게 보상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다른 답변은 제가 할 수 없거니와, 누군가는 꼭 이런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마침 권승준 님에 대한 답글은 아니지만, 저 또한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어제 써서 게시했습니다. 학생들을 인솔해 기차를 타고 오가는 중 써서 제대로 정서(淨書)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으로 제 답변을 갈음해 보렵니다.
休
저는 크루그먼이 고의나 무지로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누락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편입니다 ㅎㅎ 다만, 크루그먼의 우화가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어던 거대한 현상을 심플하게 설명하려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 같기도 합니다. 충환님 생각에는 기술발전으로 생기는 보상을 누가 가져간다고 보시나요?
저는 크루그먼이 고의나 무지로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누락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편입니다 ㅎㅎ 다만, 크루그먼의 우화가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어던 거대한 현상을 심플하게 설명하려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 같기도 합니다. 충환님 생각에는 기술발전으로 생기는 보상을 누가 가져간다고 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