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의 기록: 파우치가 응답했다 (1)
2022/08/26
이 글은 지난 수하일 샤힌 ①, ②편에 이어 SBS 김수형 기자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의 경험담을 옮긴 것입니다. 트럼프 정권의 후기와 미국 팬데믹 대처의 혼란, 그리고 정권 교체에 이르는 가장 뜨거웠던 시기에 미국 정치의 한 가운데서 직접 목격하고 취재한 이야기를 오터레터 독자들에게 전해드리기 위해 연재를 부탁드렸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0월에 출간 예정인 책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책이 출간되면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2019년부터 임기를 시작한 특파원들은 우스갯소리로 1백 년 만의 팬데믹과 2백 년 만의 의회 폭동을 모두 겪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역사에 남을 큰 사건을 많이 겪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코로나 팬데믹은 요란한 면이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역 지휘는 갈팡질팡했고, 대통령 선거까지 거치면서 보건 정책이 극도로 정치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코로나 방역 정책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백악관 수석의료 보좌관이었다. 코로나가 낳은 미국의 방역 스타로 '과학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는 '나치'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설명과 전망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고, 코로나 국면을 미국에서 보냈던 기자 입장에서는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백악관 브리핑은 물론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접했던 파우치 박사는 목소리만 들어도 컨디션이 어떤지 아는 수준이 됐다. 파우치 박사 인터뷰에 무려 2년 넘는 섭외 기간을 거치면서 취재하기 어려운 인물에게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다. 이번 편은 미국 전염병 대응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파우치 박사에 대한 설명과 지난 5월, 그와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을 담았다.
미국 감염병 대응의 산증인
파우치 박사는 한국에는 코로나 사태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활약은 1980년대 미국의 AIDS, HIV 유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IDS에 대한 공포감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던 시절, 젊은 나이로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파우치 박사는 AIDS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AIDS 환자와 일상적인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그는 수많은 방송에 출연해 미국인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1980년 대 AIDS 강연 영상이 유튜브에 꽤 있는데, 지금 들어봐도 정말 쉽고 간단하게 이 전염병의 실체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당시 AIDS 연구에 올인한 것은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 미지의 신종 감염병이어서 그가 제출한 AIDS 관련 첫 연구 보고서는 학술지에서 너무 과민 반응하는 내용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는 그때부터 행정, 연구, 치료를 모두 저글링 하듯이 병행하는 엄청난 일 중독자였다.
당시 파우치 박사는 AIDS 인권 단체의 주요 공격 표적이었다. AIDS 환자들은 면역력이 떨어져 여러 질병으로 후유증을 앓다가 처참하게 숨지는 경우가 많았다. 치명률이 워낙 높아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가 미전역을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한 해 수 만 명씩 숨지는 사람이 나오는데도 미국 정부가 치료제 개발에 미온적이라는 것이 인권 단체들의 불만이었다. 유명한 AIDS 인권 운동가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는 파우치 박사에 대해 '멍청한 살인자'라는 극언을 담은 공개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