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간 단축을 위해 투수의 견제를 제한하면, 야구가 재미있어질까?

오찬호
2023/02/18
도루의 매력은, '투수가 또 견제할 수 있다'가 아닐까? - 픽사 베이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8년 우승 후,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에 걸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우승을 위해서는 리그 챔피언부터 되어야 하는데 늘 (베이비루스를 데려간) 뉴욕 양키스이라는 벽 앞에 막히기 일쑤였다. 200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쉽에서 양키스와 맞붙은 레드삭스는 3차전까지 전패 중이었다. 그리고 4차전에서도  9회 초까지 4대 3으로 지고 있었다.

아웃카운트 3개만이 남은 상황, 양키스는 게임을 끝내고자 정규시즌 53세이브, 방어율 1.94를 기록한 특급 투수를 마운드에 올린다. 훗날 652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는 ‘전설’ 마리아노 리베라였다. 그러니까, 밤비노의 저주는 계속될 것이 뻔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은 마음이었다고 했던가. 펜웨이 파크를 가득 메운 레드삭스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소리에 투수가 흔들린다. 첫 타자 볼넷. 벤치는 시즌 중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지금 LA다저스의 감독인) ‘데이브 로버츠’를 대주자로 투입한다. 그해 38개의 도루를 성공한 선수가 1루에 나갔으니, 작전은 하나였다. 도루. 

리베라는 타자에게 공 하나 던지지 않고 세 번이나 주자를 견제한다. 로버츠는 견제 때마다 리드폭을 더 넓히는 강심장을 보여준다. 세 번째에는 지금 같아서는 비디오 판독도 요청할 만큼 아슬아슬한 차이로 세이프였다. 죽어도 도루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투수의 결의가 대단했지만, 주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리베라가 타자를 향해 몸 중심을 옮기자, 로버츠는 용수철처럼 2루를 향해 돌진한다. 호르헤 포사다 포수의 빠른 송구를 받은 유격수 데릭 지터의 태그. 하지만 세이프.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안타, 득점, 동점, 연장전에 데이빗 오티즈의 끝내기 홈런. 그리고 4연승으로 리버스 스윕. 7전 4선승제 시리즈에서 메이저리그 최초였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레드삭스는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우승한다. 이 기적의 물꼬였던 로버츠의 도루를 ‘THE STEAL’이라고 한다. 완벽했기에 붙은 말이겠지만 도루 하나가 야구의 흐름을 단번에 바꾸어버릴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일 거다. 반드시 막겠다는 투수의 견제 세 번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주자의 모습은, 다양한 재능이 뭉쳐져야 강팀이 된다는 게 야구의 진리라는 걸 완벽하게 보여줬다. 그 도루는, 어떤 삼진아웃이나 만루홈런보다도 강렬했다. 

긴장감 가득했던 이 장면을 또 볼 수 있을까? 어려울 듯하다. 떠나가는 팬들을 잡겠다며, 어떻게든 경기시간을 단축하겠다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올해부터 여러 제한 규정들을 신설했다. 수비 시프트 제한, 투구 사이 시간 제한 그리고 ‘견제 제한’이다. 한 타자를 상대하면서 주자 견제는 두 번까지만 허용된다. 세 번도 가능한데, 단 잡아내지 못하면 주자는 자동으로 진루한다. 

주자 입장에서는 견제가 약해지니 도루를 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그래서 주력이 좋은 선수가 중요해질 거라고 하겠지만, 견제 제한은 도루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도루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투수의 견제를 뚫고 자신의 힘으로 한 베이스를 오직 뛰어서 갈 때 빛난다. 투수가 언제든지 견제할 수 있으니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고 그럼에도 달리니 짜릿함은 배가 된다. 그 순간 한 번이면, 긴 경기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참고로 'THE STEAL'에서 첫 번째 견제부터 도루 성공까지의 시간은 고작 1분 30초였다. 사람들이 이 90초 안에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투수는 또 견제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견제가 두 번으로 제한되었다면 없었을 ‘결정적 장면’이었다.

야구의 묘미는, 긴 경기시간 안에 등장하는 '어떤' 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과연 아무런 상관성이 없을까?

* 데릭 지터는 리베라가 견제를 하나 더 하길 바랬다. 투수의 '권한'을 최대치로 사용하는 게 야구라는  말이다. 로버츠는 견제 덕택에 (10여 일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던) 몸이 풀리고 또 경기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견제가 한 번만 더 있었다면 아웃되었을 거라니 죽을 각오로 리드폭을 벌렸다는 거다. 그러니 'THE STEAL' 아니겠는가.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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