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 역사 이야기] 2. DNA는 왜 오랫동안 듣보잡 물질 취급받았나

남궁석
남궁석 · SLMS
2023/05/10
분자생물학의 역사를 읽다보면 초창기 유전 물질의 정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을때, DNA 같은 ‘시시한 물질’ 이 유전 정보의 근원 물질이라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번 에이버리에 대한 글을 쓸때 일부 연구자 (굳이 에즈라 머스키라고는 안했다 ㅋ) 들은 DNA 에 유전 물질이라는 증거가 속속 등장하는 와중에서도 ‘DNA 같은 허접한 물질이 유전 정보를 담고 있을 리가 없어! 나의 유전 정보는 그러지 않아!’ 하고 절규(?)했다.

즉 DNA에 유전 정보가 담겨져 있다라는 사실은 하루 아침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증거가 축적되어 더 이상 부인하기 힘들어질 때 비로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DNA 라는 물질이 알려진 지 얼마 안 되서? 그러나 DNA 의 발견은 DNA가 유전 정보의 근원 물질이라는 1944년의 에이버리의 발견보다 훨씬 이전이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스위스의 의사양반 프리드리히 미셔가 세포핵 속에 잔뜩 들어 있는 물질을 분리하고 이를 ‘뉴클레인’ (Nuclein) 이라고 명명한 것은 1868년이고, DNA가 염기, 탄소가 5개 있는 당, 인산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10년이다. 즉 DNA의 이중 나선 구조 등이 밝혀진 것은 1950년대 이후이지만, 적어도 DNA 라는 물질은 에이버리가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물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DNA 가 유전 현상의 핵심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무시했을까? 그리고 DNA 대신 어떤 물질을 유전 물질의 후보라고 생각했을까? 오늘은 분자생물학 초기에 DNA가 무시받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프리드리히 미셔와 뉴클레인의 발견

프리드리히 미셔 (Friedrich Miescher)는 1844 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원래 의사였던 미셔는 청력이 좋지 않아 임상의사로써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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