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중간정산] 즐거운 연말인데 그럴 것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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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mpman84 · 방송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2024/05/14
 지난 매듭달의 마지막 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괜찮은 저녁을 한 끼 먹고 싶었다. 연말이라 왠지 들뜨기도 하고 새해의 둘째 날이 결혼기념일이기도 해서였다. 처갓댁에 아이를 맡기고 아내와 둘이서만 길을 나섰다. 연애하던 때와 비슷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며 밤의 강변북로를 달렸다. 우리가 갈 곳은 을지로에 자리 잡은 오래된 가게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이태리 식당이며, 1967년부터 운영한 노포라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

 아내는 최근에 고모님과 이곳을 다녀왔더랬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면서 나와 함께 또다시 이곳에 들렀다. 고모님은 실로 오랜만에, 정확히는 30년 만에, 여기 음식과 재회했고 여전한 그 맛에 울컥했다 한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아이와 함께 즐겨가는 단골집이 있었으면, 그 집이 오래도록 영업해서 아이가 자신의 아이도 데리고 갔으면, 자리에 앉아서 "여기가 아빠 어릴 적 할아버지하고 자주 오던 데야."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아마 어려운 일일 게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곳이라 오래가는 가게라는 게 몇 없다. 그러고 보면 아내와 연애할 때 자주 갔던 대학로 천년동안도, 이태원의 펍 116-7번지, 중식집 홀리차우 본점, 홍석천의 아워플레이스, 상수동 화화 등은 지금은 죄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겨울 추위에 곱은 손을 호호 불면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서둘러 주문을 했다. 이곳의 시그니쳐 메뉴라는 양파 수프를 비롯해서 칼라마리 프리타, 파스타 두 개, 후식으로는 젤라토. 그리고 이런 식사에 빠지면 섭섭한 하우스 와인도 한 잔. 그런데 아내가 시킨 링귀니 파스타는 금방 나왔는데 내 올드패션드 토마토 파스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말이라 바쁜가 봐." 하며 아내의 파스타 접시를 가운데 두고서 둘이 나눠 먹었다. 아까 수프가 나올 때도 한참이나 걸렸기에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었다. 그렇게 절반이 넘게 먹었을 때 즈음에도 감감무소식. 결국 접시를 싹싹 비웠는데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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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좀 더 즐거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열정 따위 없는 룸펜이고 싶습니다. 먹고 살아야 해서 어느 지상파 방송사에서 10여년째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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