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서는 읽으라고 주는 겁니다
2023/09/29
먼 옛날에 학원 강의실에서 선생님이 시험지 뭉치를 엮은 스테이플러 심 몇 개를 빼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전용 도구가 없어서 모두 교무실에 다녀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서슴없이 나서서 스테이플러를 거꾸로 쥐고 뒤쪽 돌기로 심을 빼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그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설명서에 적혀 있어요.”라고 답했다. 정말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심을 제거할 때 스테이플러 하단 뒷부분의 납작한 돌기를 이용하라는 안내가 박스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내 말에 선생님과 친구들은 대체 누가 스테이플러 설명서를 보느냐고 황당해했고, 나는 설명서 따위 아무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려진 물건을 여럿 들여다보는 요즘은 그런 경향이 한층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지금 사용중인 로봇청소기도 역시나 주워온 물건인데, 가져올 때는 멀쩡한 로봇청소기를 버릴 사람이 있을 턱이 없으니 필요한 부품만 빼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원을 꽂고 앱을 연동해 보니 이게 웬걸, 아무 문제도 없었다. 심지어 배터리가 노후된 기색도 없었다. 아주 더럽혀져서 먼지통이 뽑히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대체 이걸 왜 버렸을까 한참 고민한 나는, 흡입구부터 먼지통까지 고운 먼지와 머리카락 따위가 달라붙어 있으며 센서 덮개에 흠집이 심하게 난 것을 보고, 사용자가 로봇청소기를 설정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으리라 추측했다. 먼지가 아예 들러붙은 것은 화장실이나 베란다의 물기를 빨아들인 탓이고, 센서 덮개에 흠집이 난 것은 높이가 아주 애매한 가구 밑에 반복적으로 들어간 탓이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거실 바닥에서 분갈이를 하거나 로봇청소기 격투 대회 따위를 즐긴 게 아니라면 그럴 것이었다. 적절한 사용법 설명을 보고 설정만 잘 했더라면 사용자도 만족하고 로봇청소기도 멀쩡히 제 역할을 했을 텐데 비극이 따로 없었다. 결과적으로 주운 내가 이득을 보긴 했지만, 이런 식의 사소한 이득보다는 괜히 버려지는 물건이 ...
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평소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이 있었던 문제를, 비로소 작가님 글을 통해 정체를 알게 되었네요. 현대 소비자의 계륵 같은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