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중산층이 될 수 없는 시대는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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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7
<울산 디스토피아>는 야심찬 이야기다. 저자 양승훈(경남대 교수)은 울산에 천착하되 울산을 뛰어넘는 의제를 던지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의제를 아래 다섯 개의 주장으로 정리했다. 
 
다섯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전개되는 주장이다. 어떻게?

핵심 주장 1 “’노동자 중산층’이 중요하다.” 
 
왜 울산인가? 

상징적인 도시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화 전략으로, 혼자 벌어도 4인 가족을 건사할 만한 블루칼라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 이것으로 ‘노동자 중산층’이 탄생했다.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서울로 가지 않아도 중산층에 진입할 경로가 생긴 것이다. 울산은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이 모두 있는 중화학공업 중심 도시다. 노동자 중산층 밀집 도시라는 뜻이다. 
 
‘노동자 중산층’이 왜 중요한가? 

지식경제, 최첨단 산업에서는 고소득 일자리가 나오지만 숫자가 많지 않다. 중산층 소득 수준의 일자리를 대규모로 만들어내는 힘은 여전히 제조업에 있다. 노동자 중산층이 없으면 결국 사회 전체의 중산층이 얇아진다. 그러면서 온갖 사회 문제가 분출하게 된다. 울산이 ‘디스토피아’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중산층이 얇아진다는 뜻이고 울산이라는 한 도시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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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주장 2 “노동자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이유는 기술 발전 같은 불가항력의 힘 때문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전략 때문이다.” 
 
제조업 쇠퇴는 자동화 기술 발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미래 아닌가? 

흔한 오해다. 정확히 말하면 제조업이 쇠퇴한 게 아니다. 제조업 안에서 현장 노동자의 기여가 쇠퇴한 것이다. 현대자동차를 예로 들겠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생산 현장 숙련공들의 기량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숙련공들이 현장에서 이리저리 고민하고 실험한 결과가 혁신으로, 자동차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다르다. 고학력의 전문 설계 엔지니어들이 현대차의 핵심 전력이다. 이 사람들은 울산 공장이 아니라 수도권에 있는 남양연구소에서 일한다. 이런 걸 산업 연구자들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고 부른다. 설계하는 팀 따로, 만드는 팀 따로다.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면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혁신이 구상에서 일어난다. 현장이 혁신의 산실이던 시절이 옛말이 된다. 실행은 구상을 단순 집행하는 역할에 머물게 된다. 현장 일이 쉬워진다. 그 반대급부로, 가치도 낮아진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되니까. 현장에 ‘숙련’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면 ‘구상’과 ‘실행’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떼어 놓을 수 있다. 설계는 수도권에서 생산은 울산에서 한다. 현장 숙련이 중요한 사업장은 이렇게 하면 당장 문제가 생기니까 설계 엔지니어들도 공장 근처에서 일한다. 하지만 구상과 실행이 분리될 대로 분리된 자동차는 별 문제가 없다. 숙련은 수도권이 보유하고 지방은 단순 제조만 하니, 지방은 중산층이 생기기 갈수록 어려워진다.  
 
자동차 산업의 본질적 특징 아닌가? 

역시 흔한 오해다. 자동차는 컨베이어벨트 이미지 때문에 단순 조립 공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안 그런 나라도 많다. 독일은 구상과 실행이 모두 고숙련이다. 설계도 잘 하지만, 현장에서도 숙련에 기반한 혁신이 계속 일어난다. 구상과 실행이 고숙련 시너지를 내는 이상적 모델이다. 스웨덴 자동차 산업은 현장 숙련이 더 중심이 된다. 그래서 스웨덴은 생산직의 힘이 세다.  

현대차는 구상 역량을 극대화해, 실행의 고숙련을 요구하지 않고도 고품질을 달성한 나름 독특한 모델이다. 이것은 자동차 산업의 본질 같은 게 아니라 한국 중화학 공업의 역사적 궤적의 산물이다. 
 
다른 길, 그러니까 독일이나 스웨덴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현대차는 초창기에 그렇게 시작했다. 현장팀하고 연구소팀하고 경쟁을 붙여 보니, 포니(한국 최초의 독자 생산 국산 자동차. 1975년에 출시했다)까지는 현장 팀이 이겼다. 더 잘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 1987년 이후에 현대차 노조가 해 온 투쟁이라는 게, 본질상 ‘노동강도 낮추기’와 ‘임금 복리후생 높이기’ 둘이었다. 현장 숙련을 강화하는 투쟁은 거의 안 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반대로 투쟁을 했지. 
 
반대라고 하면? 

사측이 현장 숙련 프로젝트를 들고 와도 엎어 버렸다. 1990년대에 현대차가 당시 유행하던 도요타식 생산방식 도입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컨베이어벨트 대신 노동자 몇 명이 한 조를 이뤄서 조별로 차를 조립한다. 현장에서 혁신이 일어나는 방식인데, 노조가 되게 싫어했다. 피곤하니까. 새로 배워야 할 기술도 많고, 노동자들이 되게 자발적으로 뭘 자꾸 하는 시스템이니까. 조별로 품질 책임도 져야 되고, 아무튼 되게 신경쓸 게 많은 생산방식이었다. 현장 통제 강화라며 반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조의 투쟁이 현장의 숙련을 쌓는 게 아니라 없애는 방향으로 갔다? 

그렇다. 지금은 노조 지도자들도 인정하는 얘기다. 이에 사측은, 사측 나름의 전략이기도 하고 노측 전략에 대응이기도 한데, 설계 분야에서 숙련을 끌어올리고 생산은 최대한 단순 작업에 가깝게 재편하는 길로 갔다. 현대차가 그 길을 20년 간 결과가 지금이다. 사측은 세계적인 경쟁력의 자동차 회사, 노측은 숙련이라는 지렛대가 없어서 협상력이 매우 낮고 사실상 제도적 보호에만 의존하는 상태.  

현대차 사측은 지금 남은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 임금은 얼마든지 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은퇴한 자리를 안 채우면 되니까. 현장 숙련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가끔 생산직 공채를 뽑는 건 정치권에 주는 선물 성격이 클 뿐, 생산에 절실한 필요가 있는 건 아니다.  
 
조선업은 자동차와 달리 표준화가 어려워서 현장 숙련이 중요한 산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말은 자체로는 맞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서울 본사에서 일하는 조선 엔지니어가 주 4일씩 현장 출장을 간다고 하면, 앞으로는 주 이틀, 주 하루 이렇게 계속 줄어들 것이다. 요즘 조선회사들이 생산 현장을 메타버스(디지털 트윈)로 사이버 공간에 구현하는 걸 열심히 한다. 이게 궤도에 오르면 설계 엔지니어가 공장 안 가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역시 목표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다. 이런 식의 접근법이 전방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에서 먼저 일어난 일이 중화학공업 전반에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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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주장 3 “노동자 중산층이 사라지면 불평등, 가족, 교육, 지방균형발전 등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분출한다.” 
  
현대차 사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고 생산 현장에 숙련이 사라지면, 노동자 중산층은 재생산될 수 없다. 이게 핵심이다. 이것은 기술 발전이 가져올 운명도 자동차 산업의 숙명도 아니다. 노측, 사측, 공공 등 여러 주체들의 전략과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렇게 노동자 중산층이 줄어들면 생산을 넘어 사회 전체로 효과가 파급된다. 대표적인 영역이 젠더, 그리고 교육이다.  
 
왜 젠더인가? 

울산은 ‘남성 블루칼라 가장이 외벌이로 부양하는 4인가족 중산층’의 도시였다. 이 모델이 작동하던 시기에는 여성들도 울산으로 유입이 됐다. 소득이 괜찮은 노동자 남성과 결혼해 중산층 전업주부를 할 여성들이 있었다. 지금은 이게 무너졌다. 

노동자 중산층 남성이 줄어든다. 결혼 적령기 청년 남성들은 부모 세대만큼 쉽게 고소득 블루칼라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울산에는 여성들이 ‘커리어’를 쌓아 나갈 일자리가 없다. 전업주부로 평생 살면서 보조 소득만 벌 수는 있지만, 자기 경력을 생각하는 여성은 선택지가 교사 공무원 말고는 없다. 수도권 여성들처럼 출산 후 경력단절이 고민이 아니라, 아예 경력 출발부터가 문제다. 

그 결과로 젊은 여성이 빠르게 유출된다. 서비스산업 노동시장이 형성된 부산으로 많이 간다. 울산에 남은 결혼 적령기 남성은 짝을 찾을 가능성이 계속 떨어진다. 노동자 중산층의 재생산은 이렇게 또 한 번 위기로 몰린다.  
 
교육에 끼치는 영향은? 

두 가지로 나눠 보자. 첫째, ‘노동자 중산층’이라는 삶의 경로가 막히면 대입 경쟁이 과열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 진입 여부를 오직 입시 결과에만 베팅하게 된다. 입시 성적과 관련이 떨어지는 중산층 진입 경로를 많이 만들어야 입시 문제도 완화할 수 있다. 

둘째, 지방대 문제다. 지방대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 지도 좀 됐다. 서울에서 먼 곳부터 망할 거라는 말인데, 역시 우리 주제와 이어져 있는 문제다.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면 부가가치는 어디서 만드나? 구상이 만든다. 구상은 어디 밀집해 있나? 전부 서울에 있다.  

과거에 지방 거점 국립대는 하나씩 특기가 있었다. 부산대는 기계, 경북대는 전자 이런 식으로 중화학공업과 대학이 연계되었다. 이런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는 구상과 실행이 한 공간에서 굴러가던 시절에 그 현장 엘리트를 담당했다. 지금은 이 공간이 사라지고 ‘서울 엘리트’와 ‘지방 비숙련 생산직’으로 점점 양분되어 가는데, 지방대학이 무슨 매력을 줄 수 있을까? 
 
노동자 중산층의 재생산을 전제로 구성된 시스템 전체가 삐걱거린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1973년 체제’라는 표현을 쓴다. 1973년은 박정희가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를 본격 시동 건 해다. 이후 한국 사회는 지방의 중공업 단지가 지방대학 졸업생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동자 중산층을 두텁게 쌓고, 이들이 지방의 주요 소비층이 되고, 중산층 가족을 꾸려 인구를 재생산했다. 경제활동을 넘어 가족, 교육, 지방균형발전까지 연계되어 작동한 게 ‘1973년 체제’다.  

‘구상의 고숙련과 실행의 저숙련 조합’은 이 체제를 본질적으로 흔든다. 지방에는 노동자 중산층이 사라진다. 이러면 지방대가 매력이 낮아진다. 교육된 고급 인력이 지방에 부족해지고, 이러면 다시 지방의 부가가치 생산 역량이 더 떨어진다. 이 악순환을 젠더 불균형이 다시 더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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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주장 4 “공장이 늘어나야 지방이 살아난다? 틀렸다. '현장에서 부가가치를 만드는 공장'이 늘어나야 지방이 살아난다.”
 
지방 소멸 담론이 나온지도 꽤 됐다. 해법이 일자리라는 얘기도 오래 한 것 같다. 양승훈의 의제는 이 익숙한 설명과 무엇이 다른가? 

해법이 일자리는 맞다. 그런데 지방에 공장이 없어서 일자리가 사라지는 문제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메가 트렌드를 그대로 두면, 지방에 공장이 늘어도 충분한 소득이 나올 수 없다. 단순 조립만 하는 공장에서는 노동자 중산층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해법은 그냥 공장이 아니다. ‘현장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니 자꾸 엉뚱한 대책이 나온다.  

조선업은 지금도 일손을 못 구해서 허덕인다. 하지만 조선업 일자리가 지방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일부 고숙련 용접공을 빼면 조선업 임금이 아주 낮다. 요구하는 숙련 수준이 낮아서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해도 굴러가는 실정이다. 이런 일자리로는 노동자 중산층이 생기지 않고, 따라서 지방 문제도 풀리지 않는다.  
 
진단이 나왔다면 해법도 있을 것 같다? 

어렵다. 하지만 원리상 생각해볼 해법은 있다. 첫째, 구상과 실행을 통합해 생산 현장에서 부가가치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둘째, 지방의 광역화가 중요하다. 

첫번째부터 보자. 현대차는 이미 자기 전략대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인데, 다시 불확실한 ‘구상과 실행의 통합’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글로벌 추세를 보면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독일도 점점 더 고학력 엔지니어의 비중이 강화되는 추세다. 말하자면 ‘현대차화’하는 중이다. 글로벌 대기업을 ‘구상과 실행의 통합’으로 되돌리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일단 전제해야 한다. 

나는 중화학 공업 생태계에서 ‘벤더’(협력사. 대기업 수준인 1차 벤더부터, 2차 3차… 로 내려갈수록 작은 하청기업까지 있다. 정점인 수출 대기업과 벤더들이 모여 생태계를 이룬다.)에 주목한다. 여기는 변화의 여지가 있다. 과거에는 현대차가 벤더들에게 물량을 보장해 주는 대신 현대차에 종속시키는 전략을 썼다. 그래서 큰 1차 벤더들도 구상 능력을 크게 요구받지 않았다. 그런데 정의선 회장 들어서는 접근법이 달라졌다. 벤츠에, 테슬라에, 도요타에 납품할 수 있는 품질을 들고 오라고 요구한다. 이러면 벤더들도 기술개발 해야 하고 생산혁신 해야 한다. 아마 서로간에 흡수합병도 필요할 것이다. 

이 벤더들이 대형화하면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구상과 실행의 통합’ 경로를 택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이 단계는 정말 현장 숙련이 차이를 만드니까. 그렇게 해서 현장 숙련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생력 있는 대기업이 나올 수 있다. 이걸 정책 목표로 삼고 지방정부가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지방이 자생력을 갖추려면 결국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자리가 많아야 하니 울산 같은 지방정부가 추진할 명분은 충분하다. 벤더에서부터 풀어 가면 아직 희망이 있다. 

이런 일자리는 단순한 ‘공장이 늘어서 생기는 일자리’가 아니다. 현장에서 부가가치가 만들어지는, 따라서 고소득이 가능한 제조업 일자리다. 이런 공장이 늘어야 한다.  
 
광역화는 왜 중요한가? 

산업도시들은 생산자 서비스 기능을 필요로 한다. 대표적으로 무역에 필요한 물류, 법률지원, 보험 등이 있다. 이런 기능을 울산이 갖추고 있지 않지만 부산은 강하다. 두 권역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게 되면 시너지가 날 것이다. 

이러면 일자리의 다양성이 높아진다. 지금 울산은 블루칼라 말고는 일자리가 없어서 여성들이 떠나는 도시고, 부산은 소득 괜찮은 제조업 일자리가 너무 없어서 인구가 유출되는 도시다. 제조업과 생산자 서비스가 결합하면 일자리 다양성이 높아져서 인구를 붙잡아두는 효과, 성비 균형을 이루는 효과를 낼 것이다.  

커리어를 생각하는 결혼 적령기 여성은 중화학 공업 도시에서 선택지가 거의 없다. 서비스 노동시장이 형성된 부산으로 간다. 여기서 부산과 울산이 생활권이 분리되면 젠더 문제가 안 풀린다. 한 생활권으로 통합되고, 수도권처럼 전철 타고 오가는 공간이 되면 이 문제가 풀릴 수 있다. 일자리 다양성이 높아지면 지방대도 광역화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  
 
핵심 주장 5 “‘구상과 실행의 통합 전략’과 ‘광역화 전략’은 노동자 중산층 재생산을 위한 두 기둥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불평등 문제, 지나친 교육열 문제, 지방대 소멸 문제, 수도권 지방 불균형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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