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려 이 친구야.
2023/10/30
정신 차려 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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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수십 년 습관처럼 당연히 다니던 교회를 나온지 4년째. 일요일 오후에 예배 (를 빙자한) 모임을 가지고 있다. 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저마다 가능한 음식들을 싸 와서 나누는 게 관례다. 지난 일요일은 아내가 바빠서 과일을 사 가기로 했다. 토요일 대충 인원수에 맞게 귤과 샤인머스켓을 산 아내는 박스를 굳이 따서 쇼핑백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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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고 가면 되잖아. 박스째.”
“준하 아빠 혼자 들고 가려면 짐 돼. 풀어서 쇼핑백에 넣어 가면 간편하고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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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박스 두 개를 안고 전철이나 버스 타기도 그렇다. 아내는 과일을 쇼핑백에 넣고 단단히 여며 두었다. 나는 좀 늦을 거 같으니까 당신은 꼭 시간 맞춰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날은 다른 교회와의 교류 행사로 다른 교회 평신도가 ‘하늘 뜻 펴기’ 즉 설교를 하게 돼 있었던 것이다. “손님이 오시는데 미리미리 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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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사우나에서 늘어지게 목욕을 하고 바삐 집을 나서는 아내가 한 번 더 당부를 하고 나갔다. “지각하지 마. 과일 잘 챙기고.” 아니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인가. “아 알았다고!” 시간은 넉넉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두 시까지 광화문 가면 되니 집 앞에서 1시에만 버스를 타면 시위로 광화문이 통제되지 않는 한 시간에 닿게 갈 수 있었다. 집에 있으면 뭐하나. 나는 모닝커피를 마실 겸 동네 까페를 찾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작업을 하고 책도 보고 뉴스도 보면서 일요일 오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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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 그러다보니 시간이 1시에 가까웠다. 가야겠다. 기운차게 걸어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바로 버스가 들어온다. 뭐 한 30분 빨리 갈 수도 있겠구나. 랄라룰루 흥얼거리면서 버스에 올라타서 넷플릭스 앱을 켰다. 양화대교를 지나 홍대 앞에 이르렀을 무렵, 가방 위에 얹고 보던 핸드폰이 급정거에 굴러 떨어졌다. 데구르르 에휴.... 핸드폰을 줍는 순간 갑자기 눈 앞이 화이트보드가 됐다...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