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이 단독으로 벌인 오사카 3.19 독립운동

칭징저
칭징저 · 서평가, 책 읽는 사람
2023/10/29
오사카 독립운동 시절의 염상섭(가운데, 우리문화신문에서 발췌)

염상섭이 단독으로 벌인 오사카 3.19 독립운동

염상섭의 자기 찾기는 도쿄와 교토에서의 8년간의 역정이었다. 염상섭의 자기 찾기는 일본의 근대 교육을 통해서였다. 이는 염상섭의 자아 형성기의 통과제의 과정이었다. 그만큼 염상섭의 경도부립 제2중학교의 교육은 염상섭의 자아 형성의 원형질이었다. 염상섭이 유독 중학교 과정을 일본의 명문 학교에서 마침으로써 그에게는 남다른 긍지와 자존심이 생겼다. 염상섭이 경도부립 제2중학을 졸업한 것은 1918년 3월이었다. 2년 6개월의 경도에서의 학업을 마친 염상섭은 다시 동경으로 왔다. 일본에 온지 6년이 되었고 그의 나이 21세였다. 

염상섭이 스루가에서 방황과 반동적 기분에 싸여 아르바이트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는 독립운동의 모의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그들은 재일본 조선 청년 대표단을 조직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와세다대학의 송계백, 최팔용, 이광수, 경응대학의 김철만, 김도연, 이종근, 변희용 등이었다. 이들은 1919년 2월 8일에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주모자들은 모두 검거되었지만 상해로 달아난 이광수만이 화를 면했다. 1919년 2월 12일에는 이달(李達)을 중심으로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 시위를 하던 중에 조선 학생 13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내란죄로 금고형을 받았다. 이 같은 일들은 염상섭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염상섭은 1919년 3월 초순 스루가를 벗어나 오사카에 와서야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다. 염상섭은 간간히 동경 조선 유학생의 독립 시위의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은 오사카에 와서 석간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서울의 3.1 독립운동 소식을 들은 염상섭은 “피의 혈관이 터질 듯이 더 끓어올랐다.” 

염상섭은 기원절을 기해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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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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