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다 협동조합을 시작했을까?: 운동, 부문, 조직으로 본 역사



서문만 읽어도 되는 책은 흔치 않다. 보통의 서문은 저자가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와 이 책에서 다룰 내용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기에 ‘맛보기’로 볼 수 있다. 살짝 찍어 간만 보는 셈인데 그것만으로 그 맛을 평가하기란 어렵다.
  
협동조합에 관한 깊은 맛
   
그런데 이 책은 살짝 본 간에서 너무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협동조합이란 무엇이고 왜 만들어졌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은 이렇게 답한다. “협동조합의 역사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유를 추구한 사람들의 역사이며,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공동으로 결사한 사람들이 이룬 운명공동체의 역사이며, 필요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고양되고자 열망한 해방의 역사다. 계급으로 구분 짓지 않고 노동으로 공동체가 되는 역사이며, 작은 것들의 연합의 역사이며, 큰 것은 작은 것을 돌보고 작은 것은 큰 것을 지킨 역사이며,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 역사다. 성장의 신화가 아닌 공생과 공존 번영의 역사이며, 생산은 소비와 통하고 소비는 노동을 보살피며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서로돌봄의 역사다. 성공은 나눔과 확산의 토양을 만들고, 실패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거름이 되는 역사다.”(15쪽)
   
이 정도 맛이 처음부터 올라오면 협동조합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려고 조미료를 팍팍 친 게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몇 문단 뒤에서 저자는 역사란 얼기설기 엮은 조각보가 아니라 새로운 모험의 지도를 그리는 거라 말하며 깊은 맛을 낸 재료들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협동조합 안에서 어떻게 협동하고 있는가
·협동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혹시 괴롭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협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훈련하고 있는가? 
·협동조합인들은 경쟁하는 사람이 협동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협동조합은 협동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할까? 
·협동조합은 어떻게 일터에서 갑과 을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꿀 수 있을까? 
·미래에 필요한 협동조합은 어떤 형태일까?
   
스스로를 협동조합 덕후로 소개하는 저자이기에 질문은 현실적이고, 이후의 내용은 저자가 이 각각의 재료들을 손질하는 과정이다. 서문에서 느낀 맛을 본문의 재료들에서 찾는 건 독자의 몫이다.
   
나열이 아닌 답을 찾아가기 위한 질문
   
역사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책은 연대기식 나열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가령 협동조합 7원칙은 왜 100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협동조합 7원칙은 이런 것이라는 나열식의 설명보다 어떤 논의과정을 통해 왜 만들어졌고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은 죽은 모델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움직이는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가지고 씌어졌다. 

더 나아가 협동조합이라는 개별 조직에 머물지 않고 영리기업이나 공공부문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의 주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협동조합운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산업혁명 이후 300년 이상의 시간은 협동조합운동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협동조합의 유형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왜 그런 형태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왜 초기에는 공제회가 등장했는지, 로치데일은 어떻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해방시킬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는지, 노동자협동조합이 도달하려 한 목적지는 어디였는지, 노동조합과 사회주의는 협동조합과 어떻게 만났는지, 국제협동조합연맹은 왜 더디게 만들어졌는지, 왜 협동조합공화국이라는 이상이 필요했는지, 이런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지금 현재의 고민으로 와 있다. 아, 우리가 이 어려움을 처음 겪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이런 안도감을 느끼며 시사점을 찾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교훈을 주려는 책이 아니기에 읽는 사람의 고민에 따라 다가오는 부분은 달라진다. 노동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벨기에의 빵집협동조합 보뤠트가, 새로운 사회의 원리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뿌아쏭이 꿈꿨던 협동조합공화국이, 협동조합의 위기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레이들로보고서에 대한 재해석이, 협동조합의 형식화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협동조합의 파격이 더 깊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이불보를 빨고 난 후 굵은 흰 실로 듬성듬성 꿰맨 솜이불의 바느질”(267쪽)이라 볼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와 독자의 대화가 또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