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없는 믿음, 회의 없는 정의의 비극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4/09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는 가운데 흘러나온 어느 흑인의 말은 무척 서글펐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흑인들은 (강도로 오인돼) 총을 맞기 십상이다.” 노예 해방 이후 1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인종차별의 벽은 저렇게 굳건한가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는 푸념이었다. 
   
하지만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인간에 대한 차별은 부당하다는 믿음으로 인종차별과 싸운 사람들도 많았다. 짐 존스(1931~1978)도 그중 하나였다. 짐 존스는 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며 외톨이로 자라났지만 인종차별 단체인 KKK 활동도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차별받는 흑인의 처지에 분노하는 공감력 높은 소년이었다.

위키미디어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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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친구를 집에 데려왔다가 아버지와는 말도 안 섞는 사이가 됐고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를 택했던 존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가르치는 사회주의 이념을 기독교와 결합시킨다. “극적인 사회 변혁은 오로지 종교를 통해서 인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감리교회의 청년부 전도사가 된 그는 인종 분리가 만연해 있던 기독교계에서 용감하게 인종 통합 예배를 주장하고 “흑인 형제들이 예배당 맨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논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이후로도 짐 존스의 인생의 두 축은 인종통합과 사회주의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에 더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갖는다는 사실이 역겹게 느껴졌다. 어쨌건 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자본주의 정서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종교적 사회주의의 메시지를 설교하기 위해 교회에 잠입함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점차 기존 기독교계에서 이탈해 인민사원(peolples temple)이라는 독자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게 된다. 
   
“빈민층, 흑인을 포함한 소수인종, 약물 중독자, 창녀, 노숙자, 소외된 노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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