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의 무저갱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4/05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영양제를 아주 다양하게 챙겨먹고 있다. 그 사실 자체는 최소한 한국에서는 보편적인 일이라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식탁 한쪽에 수북이 쌓인 것을 남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제법 부끄럽다. 방금 확인하니 우리집에서 지금 이용되는 영양제는 무려 12종에 달한다. 이런저런 치료를 받느라 대량의 약을 먹는 사람들이 흔히 ‘약만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약들을 챙겨 물과 함께 연거푸 삼키자면 확실히 위장 용량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게 된다는 실감이 난다. 자연히 그때마다 좀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몇달 전부터는 영양제 복용 관리 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가 먹는 영양제와 건강 상황을 등록하면 앱이 필요 용량을 계산해서 어떤 약을 하루에 몇 알씩 먹어야 하는지, 어떤 약은 건강 상황과 맞지 않으니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성분은 부족하니 더 먹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앱이다. 영양제마다 유저가 적은 후기도 볼 수 있어서 제법 유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전문 앱의 추천대로 계획을 다시 짜서 영양제를 적당히 나눠 먹기 시작하니, 일단 영양제 소비량이 줄어든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그밖의 효과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앱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영양제라는 게 근본적으로 그렇게 되어먹은 물건인 탓이리라.

여기서 강력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영양제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효능을 알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 또렷한 효과가 바로 발휘되면 그건 영양제가 아니라 의약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 복용하면 효과가 보이지 않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건강의 어떤 부분이 염려되어 영양제를 먹는 사람이라면 영양제 복용 말고도 어떤 식으로든 건강을 챙기는 활동을 하기 마련이라, 긍정적인 변화가 있어도 그게 영양제 덕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 영양제의 효능을 굳이 확인하고 싶다면 완벽히 똑같은 활동을 반복하면서 영양제를 먹는 기간과 먹지 않는 기간의 상태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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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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