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잠깐 공평하게 만드는 일

박순우(박현안)
박순우(박현안) · 쓰는 사람
2024/05/26
올해 3학년인 첫째가 병설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이는 학교에 정기적으로 와서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하는 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아이는 다른 학생의 엄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호자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도 학교에서 책을 읽어주면 안 되냐고 내게 물었다.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하던 때라, 그날 대화는 대충 얼버무리며 끝이 났다.   
   
아이가 1학년에 입학하고서야 나는 책 읽어주는 선생님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보호자 책 동아리가 있고, 그 동아리 소속 보호자들이 각자 학년을 맡아 정기적으로 책을 읽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는 카페를 하던 터라 늘 시간에 쫓겨 사는데 일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 학기 초 총회에서 보호자 동아리 소개 때,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부족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도 읽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굳이 내가?'라는 생각이 들어 못 들은 체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날 들은 이야기가 계속 내 어깨에 짐처럼 내려앉아 나를 짓눌렀다. '누군가가 내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임승차하는 게 아닐까.'     

그로부터 수개월이 흐른 뒤 학교 행사가 있어 방문한 날, 나는 다시 한번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날 나는 용기 내어 보호자 책 동아리 회장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제가 읽어줄까 봐요. 유치원."

회장은 반색하며 나를 반겼다. 연신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활동해 온 분이 이제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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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씁니다.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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