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81편 - 나의 영원한 우상이자 따거~ 그가 죽은지 21년인 오늘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24
2003년 4월 1일, 나는 군대에 있었을때다. 이 때 나는 복무 중이었고 놀라운 뉴스가 나의 귀를 때렸다. 그것은 세계적인 홍콩 스타 장국영(張國榮)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죽음이 아닌 자살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나의 우상이었고 나는 그의 영화와 음악을 들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나에게 있어 영원한 따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주윤발(周潤發)을 영원한 따거라 생각하지만 나에게 있어 따거는 오직 장국영 뿐이었다.
사진 : 2023년 4월 1일, 장국영 사망 20주기를 맞이하여 만든 포스터, 사진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영웅본색>, <동사서독>, <아비정전>, <종횡사해>, <패왕별희>, <금지옥엽>, <해피투게더>, <이도공간> 등은 나에게 있어 지금도 애장하고 있는 영화였고 그가 활동했을 때의 홍콩은 느와르 영화의 최전성기였던 때다. 그리고 나는 그가 부른 노래는 음악 저장고에 저장되어 있어 늘 애청하고 있으며 내가 아는 광동어로 된 노래는 장국영의 노래가 전부이다. 

장국영은 '홍콩직물왕'이라 불리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앨프리드 히치콕과 같은 유명 배우들이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걸출한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었던데다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 차이도 매우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와 같은 성장 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국의 리즈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중퇴했다. 장국영은 원래 가수로 데뷔했다. 국제가요제에서 1976년에 입상한 후 RTV(麗的電視, ATV의 전신)와 계약했지만, 약 6~7년 동안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소속을 TVB로 바꾸고, 화성레코드와 계약하여 1983년 <풍계속취>를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같은 소속사 가수이자 배우인 매염방과 진숙분을 포함해 소속사 식구들이 비행기 타고 각 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홍보한 결과로 보여 진다. 이 때의 성공을 두고 장국영은 매염방과 화성레코드 소속 맴버들을 죽을 때까지 고마워하며 이 시절을 회상했다 한다. 이후 1984년 진숙분이 <풍계숙취>에서 상을 타지 못해 분개하던 장국영을 위해 일본의 가수 킷카와 코지 원곡의 판권을 사서 를 발표했고 이 엘범은 초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음악들은 가요 시상식에서 연이어 수상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으며 특히 1987년에 나온 의 판매량은 단일 앨범 기준으로 당시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이 엘범에는 <천녀유혼>의 OST은 물론이고 <무심수면>은 장국영 본인이 '가장 히트한 곡'이라 언급했던 곡으로 이 곡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장국영은 가수로 성공하는 것이 주 메인이라 언급했고, 영화배우는 당시 홍콩 분위기로 볼 때 당연히 해야하는 부수적인 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중화권에서는 80~90년대의 가왕 3인방으로 알란 탐, 매염방, 그리고 장국영으로 불릴만큼 그는 영화배우보다 가수로 더 알려진 존재였고 가수라는 직업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1985년부터 가수로서 안정된 성공을 보장받기 시작하자, 배우 쪽에도 신경쓰기 시작한다. 

<장국영의 위니종정(為你鍾情)>의 경우, 장국영의 음악과 연기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히트한 작품으로 제목에서 장국영의~라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온전히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을 정도였다. 후에 장국영은 <위니종정(為你鍾情)>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동업자와 함께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장국영의 물건들, 팬들의 방문 흔적들로 장식이 되어있었으며, 종종 장국영이 와서 팬들과 간이 팬미팅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연기력 자체도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수많은 영화들 중 홍콩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담가명 감독의 1982년 작품인 <열화청춘>은 장국영의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본인의 영화 데뷔작이기 때문이고 제2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장국영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해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1990년 은퇴 선언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이후에는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보다 작가주의 색이 짙은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이 시기에 나온 <아비정전>이나 <패왕별희>는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최고로 인정 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어 성공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가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것에서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 중공 정부의 불합리한 행태에 대해서는 늘 가만있지 않았던 진정한 협객이었고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 중공에 맹비난을 퍼부었다. 

장국영의 성격과 행동, 발언 등으로 유추해 볼때 내 생각에는 최근 홍콩 민주화에 가장 먼저 앞장 섰을 인물이고 중공에 반대하여 당당히 일어섰을 위대한 반공주의자였을 것이다.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했고 직선적이었다. 불도저 같은 그의 성격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매스컴 뿐 아니라 기자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콩 언론들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고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 1990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 국적을 취득하여 아예 이민을 가버렸다. 그러나 곧 은퇴를 번복하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로 돌아와 이 영화들을 흥행시켰으며 <이도공간>이 그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자신이 머물던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의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그의 사망에는 의문점들이 많다.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천안문 발언 등으로 인해 중공에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중공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 그의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등 미스테리한 부분들이 많다. 

당시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여하튼, 오늘 홍콩박물관에서는 홍콩 정부가 주최하는 추모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장국영 생전에 콘서트에서 신었던 빨간색 하이힐과 착용했던 정장이 처음으로 공개됐다고 한다. 

그리고 무대 의상과 사진, 앨범 등 6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사망 21주기를 추모하며 대표작 <패왕별희>와 <해피 투게더>가 재개봉된다고 하니 이번에 다시 보면서 옛 추억을 곱씹어야 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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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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