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 정치학] 사납게 대드는 것 말고, 더 나은 능력으로 저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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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문학 속 한 장면] ‘책 읽는 여성에 관한 소설’ 샬럿 브론테 作 <제인 에어>


로맨스 소설로 널리 읽히는(물론 그렇게 읽어도 충분히 재밌지만) <제인 에어>는 ‘책 읽는 여성에 관한 소설’이자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여성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책 읽기와 노동, 이 두 가지는 제인이 견지하는 독립성의 토대가 된다.

<제인 에어>는 주인공이 책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제인은 외숙모의 구박과 사촌 존 리드의 괴롭힘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읽는 책이 좀 의외다. 소설도 시도 아닌 <영국 조류사>란 책이다. 열 살 소녀가 읽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혼자 있고 싶어 책장에서 그림 많은 책을 꺼내왔다는 설정이다. 곧 폭풍우가 올 것 같은 초겨울 오후의 창가에서 제인은 책을 읽는다. 거기에는 철새들이 날아가는 극지방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나는 다시 책을 보았다. 베윅이 쓴 <영국 조류사>였다. […] 나는 또한 라플란드, 시베리아, 스피츠베르겐, 노바 젬블라,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의 황량한 해변 이야기를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북극 지대의 넓은 벌판과 그 쓸쓸하고 황량한 땅들, 눈과 서리가 쌓여 있는 곳, 수 세기에 걸쳐 겨울 동안 형성된 단단한 빙하가 층층이 쌓여 알프스 산맥만큼이나 높게 북극을 둘러싸고 있어 추위가 몇 배나 더 응축된 극한 상태다’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순백의 지역을 이렇게 이해했다.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을유문화사, 8-9쪽

이 대목을 통해 샬럿 브론테가 선보이는 심상지리(心想地理) 감각은 흥미롭다. 제인은 <영국 조류사>란 책을 매개로 ‘극지방’을 상상한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 ‘저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은 바람이다. 그곳은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영국보다 훨씬 더 춥고 쓸쓸하고 황량한 곳이지만 아직 누구의 이야기도 쓰이지 않은 순백의 지역이다. 또한 극지방의 ‘응축된 냉기’는 소설 내내 제인이 선보일(또는 제인을 둘러싼) ‘열기’와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제인의 독서와 상상은 존 리드에게 방해받는다. 난폭한 존은 더부살이 처지에 돈도 한 푼 없는 사람은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며, 제인에게 책을 집어던져 상처를 입힌다.(이 장면은 여성의 독서는 물론, ‘저 너머’에 대한 상상은 처벌 받는다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제인은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린다. “이 사악하고 잔인한 놈아! 넌 살인자 같아, 넌 노예 감독 같아, 넌 로마 황제 같아!”(12-13쪽)

이 표현 또한 <로마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얻은 것이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와 칼리굴라에 대해 읽고서 품고 있었던 나름의 의견이 폭력을 당하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셈이다. 이처럼 제인이 최초로 저항하는 장면에는 그의 ‘말’이 있다. 차별과 괴롭힘과 폭력을 당해온 제인은 독서를 통해 획득한 말의 능력으로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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