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양심선언” 폭로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7/17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양심선언”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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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원춘'을 검색하면 온통 얼마 전 수원에서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한 조선족 오원춘 밖에 뜨지 않지만 진짜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원춘은 따로 있을 것 같다.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은 오원춘 납치 폭행 사건과 관련한 오원춘의 양심선언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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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원춘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과거 중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한국의 '오지'로 불리우던 경북 북부의 영양군 청기면에 살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의 평범한 삶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관에서 심기를 권장했던 시마바라라는 품종의 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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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서 시키는 일이니 망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던 터라 농민들은 저마다 시마바라 감자를 심었으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야 묵찌빠를 하든 수확을 하든 할 텐데, 이놈의 시마바라인지 시바마라인지의 감자는 싹을 도통 틔우지 못한 것이다. 영양군 전체 감자 농사가 망쪼가 들고 말았다. 억울하긴 해도 별 수 없지 않냐고 포기한 농민들도 있었지만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농민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무책임한 정부와 농협에 감자를 먹이며 피해 보상을 요구했는데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오원춘이라는 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7백만원이라는 피해 보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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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이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행방불명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행방불명은 영양천주교회의 야외미사에 오원춘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작 교회가 오원춘의 고백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어딘가로부터 돌아온 지 수십일이 지난 뒤였다. 그의 토로는 충격적이었다. 5월 5일 영양 버스 터미널에서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납치된 후 울릉도까지 끌려다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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