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못 죽이는 흡혈귀, 자살자 모임에 참석한 까닭

김성호
김성호 인증된 계정 · 좋은 사람 되기
2024/06/01
장르에도, 또 설정에도 수명이 있다. 한때 온 세상을 지배하는 듯했던 마블 시리즈가 좀처럼 흥행하지 못하는 것도, 매년 쏟아지듯 했던 좀비물이 불과 20여년 만에 크게 줄어든 것도 이를 반증한다. 대중은 무엇에든 금세 싫증을 느낀다. 아무리 잘 먹히는 공식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식상한 클리셰일 뿐이다.
 
흡혈귀, 즉 뱀파이어도 한때는 쌔끈한 소재였다. 브램 스토커가 15세기 루마니아 남부 왈라키아 공국의 잔인무도한 통치자 블라드 쩨페쉬에서 모티프를 얻어 드라큘라 백작을 창조했을 때, 이는 가히 혁신적인 캐릭터라 할 만 했다. 소설은 이내 영화가 되었다. 토드 브라우닝의 1931년 작 <드라큘라>는 창백한 얼굴, 붉은 입술을 가진 키 큰 사내가 순결한 처녀의 목덜미를 물어 피를 쫙쫙 뽑아 마시는 모습을 그려내 충격을 던졌다.
 
이후 드라큘라는 대중예술의 인기 소재로 떠올랐다. 21세기 초반 이어진 좀비물의 홍수처럼 말이다. 드라큘라가 신실하고 보수적인 삶을 살던 순결한 여성의 잠자리에 침투해서는 범해진 적 없는 새하얀 목덜미를 물고 도망치는 이야기가 수시로 영상화됐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새하얀 목덜미에 박히는 모습이 포르노그라피적 쾌감을 준다는 고백이 이어지기까지 했을 정도.
 
▲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포스터 ⓒ JIFF

장르적 수명을 극복하려는 시도들

그러나 드라큘라 또한 수명이 있었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과 토드 브라우닝의 영화는 한때 장르물처럼 빠르게 빛을 잃어버렸고, 저 유명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1992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내기까지 수십 년의 침묵을 견뎌야 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의 대양을 거슬러왔소"라는 대사에 반해 빡센 오디션을 뚫어낸 게리 올드만이 당대 최고의 악역 전문 배우로 거듭났고, 키아누 리브스, 안소니 홉킨스, 위노나 라이더, 모니카 벨루치의 열연이 빛을 발했던 바로 그 작품이다.

그럼에도 따지자면 이 또한 죽어가던 드라큘라에게 잠시 숨결을 불어넣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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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서평가, 작가, 전직 기자, 3급 항해사. 저널리즘 에세이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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